[경희대 NGO대학원·본지 공동기획] 21세기 대안의 삶을 찾아서③ 인도 오로빌 마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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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호 31면

1 지난해 1월 오로빌에서 열린 ‘한국 문화의 날’ 행사. 오로빌에선 각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행사가 자주 열린다. 2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의 해결책을 토론과 집단 명상으로 모색하는 전체회의 모습. 3 방문자센터에는 현지 생산품을 판매하는 상점과 서점이 있다. 4 태양열로 조리하는 공동 식당 ‘솔라 키친(Solar Kitchen)’에서 주민들이 음식을 만들고 있다. 김상준 교수·오로빌 제공

이름 모를 수많은 새의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창밖으론 붉은 땅, 그리고 울창한 숲. 이른 아침이지만 열대의 태양은 벌써 열기를 뿜어낸다. 인도 동남부에 위치한 오로빌은 100여 개의 아름다운 소공동체(커뮤니티)로 이루어진 녹음 속 전원마을이다. 그러나 40년 전 ‘이상공동체’를 건설하자는 꿈 하나를 가지고 첫 삽을 떴을 때만 해도 이곳은 척박한 황무지였다.

받기보다 먼저 주는 경제 화폐 없이 물건 사고판다

현재 주민은 1500여 명. 이들 중 절반 정도만이 인도인이고 나머지는 세계 각처에서 모여든 외지인이다. 주로 서유럽, 특히 프랑스와 독일에서 온 사람이 많다. 한국인 거주자도 20여 명에 이른다. 영어를 공용어로 하지만 오로빌에서 주고받는 언어는 만국기처럼 울긋불긋하다. 이제 오로빌에서 태어나 오로빌에서 교육받고, 오로빌에서 직장을 갖고 평생을 살아가는 오로빌 토박이도 적지 않다. 이들을 특별히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하기 어렵다.

오로빌에서의 첫날, 주민 이승하씨를 따라 수퍼에서 쇼핑을 하고 점심을 먹으러 공동식당에 갔다. 무엇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곳에서는 화폐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신용카드’도 없다. 네 자리 주민번호만 부르면 그것으로 모든 계산이 끝이다. 어떤 물품을 구입하든 돈 대신 계산대에서 자신의 주민번호를 직접 기입하거나 불러 주면 그만이다. 수퍼에서 장을 보든, 식당에서 밥을 먹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든, 보건소에서 치료를 받든 마찬가지다. 아이들 교육과 다채로운 문화 행사는 모두 무료다.

주민 되는 것이 특별히 어려운 일은 아니다. 오로빌 안에서, 오로빌 사람으로 살아갈 결의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삶’에 대한 의지를 필요로 한다. 동행했던 이승하씨도 젊을 적 ‘다른 삶’을 살 수 없을까 고민한 끝에 결단을 내리고 이곳에 정착한 경우다. 이제 그는 11년째 오로빌리언(Aurovillian)이다.

도서관에서 만난 50대 후반의 한 스위스 남자는 뜻밖에 자기 나라가 부패하고 너무나 미국화돼 이곳에 왔다고 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선진국도 그곳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 문제가 많다고 느껴질 것이다. 모든 일에 새로운 실험이 가능하기 때문에 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부류에는 교육수준이 높거나, 개성이 강한 사람이 많다.

오로빌은 호혜 경제, 더 정확히 말하면 자원봉사 경제다. 각자가 하는 모든 일은 자발적 봉사의 정신에 따른다. 자신의 필요가 먼저가 아니라 타인의 필요가 먼저다. 모두가 모두에게 주는 경제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받는 경제가 된다.

물론 회계는 있다. 일에 따라 급여가 책정되고 소비되는 재화와 서비스에도 모두 적정한 시장 가격이 있다. 받은 것보다 적게 쓸 수도 있고, 많이 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큰 문제가 되는 일은 좀처럼 없다. 공동체의 문제가 될 만큼 매우 큰 적자를 누적시키는 사람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오로빌이 완전한 자립경제가 아닌 이상 화폐는 필요하다. 원래 역사적으로 화폐란 공동체 사이에서 발생했다. 오로빌도 공동체 밖의 재화와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오로빌의 경제는 돈 없는 경제와 돈 있는 경제, 둘로 이뤄진다. 오로빌에도 인도화폐 ‘루피’를 받는 곳이 있다. 방문자 센터와 몇몇 지정된 장소의 매장과 식당이 그렇다.

이런 대안적 실험은 경제만이 아니다. 이곳의 모든 건축이 다 실험이다. 그래서 다 제 각각 아름답고 독창적이다. 에너지 공급도 풍력·수력·태양열 등 다양한 실험을 통해 이뤄진다. 교육 역시 스스로 깨닫기를 강조하는 대안교육이다. 정치도 실험이다. 이곳도 사람 사는 곳.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있다. 그러나 이곳엔 경찰도 법원도 감옥도 없다. 갈등 해결과 합의 도출은 사안마다 만들어지는 논의 단위에서 토론을 통해 이루어진다. 토론과 함께 집단 명상이 갈등 해결의 방법으로 채택되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오로빌의 중앙에는 ‘마티르만디르’라는 물방울 모양의 거대한 황금빛 상징물이 있다. 인류 보편의식에 기초한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지상으로부터 탄생하는 것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마티르만디르 전체는 지름 36m·높이 29m, 그 안의 명상 홀은 지름 24m·높이 15.20m에 이른다. 이 넓은 공간에 오직 한 줄기 가는 빛이 천장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바닥에 놓인 지름 1m가량의 수정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을 뿐이다. 그러곤 완전한 고요, 완벽한 침묵만이 존재한다. 이곳에 앉아 조용히 숨 쉬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말끔히 씻기는 것을 경험했다.

마티르만디르에서 만난 캐나다인 남성 캐럴은 오로빌에 대안농업을 전해 주기 위해 자비로 오로빌을 방문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설명한 방식은 완벽하게 컴퓨터로 통제되는 고층 청정 야채재배 농법. 왜 오로빌이냐고 했더니, 오로빌의 사상에 공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처럼 국제적으로 오로빌은 친구가 많다.

오로빌의 기원은 오로빈도(Aurobindo·우리말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아우로빈도)라는 인도의 저명한 한 스승이 품었던 원대한 꿈에서 유래한다. 오로빌(Auroville)은 오로빈도의 고을(ville)이란 뜻이다. 그는 간디와 타고르 이전에 인도의 완전 독립을 최초로 주장했던 지식인이자 시인이었다.

식민통치 시절 영국은 그를 가두었지만 시련은 그를 영적으로 더욱 고양시켰다. 오로빈도는 옥중의 고초 속에서 비상한 개인적 체험을 통해 ‘인류의 보편의식’을 향한 비전과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 비전에 공감한 세계인이 차츰 모여들어 오늘의 오로빌이 탄생했다. 오로빌이 40년 동안 ‘지속가능’했을 뿐 아니라 꾸준히 발전해 갈 수 있었던 까닭은 오로빈도의 꿈과 사상이 그만큼 깊고 멀리 뻗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오로빈도의 비전은 인도의 신들로부터 왔다. 식민지의 감옥에서 그가 고통받고 있을 때 그의 신들은 그를 원대한 ‘초의식(Super Consciousness)’으로 끌어올렸다. 인도를 넘어 인류 보편으로, 주어진 인간을 넘어 깨달은 인간으로 그를 이끌었던 것이다. 내가 머물렀던 짧은 기간 오로빌의 여름밤은 바람이 많고 빗발도 간간이 뿌렸다. 열대의 밤 나의 꿈을 스쳐갔던 그 바람 속에도 오로빈도의 신들의 웅혼한 숨소리가 섞여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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