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래기국처럼 소탈한 우리말, 야무지게 담아낸 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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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호 03면

그의 목소리에선 시래기국 냄새가 묻어난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지짐이 부치듯 꾹꾹 눌러 턱턱 끊어 치는 입이 야물고 오달지다. 그 야무진 입이 꼬박 18년을 지켜온 MBC FM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이하 ‘배캠프’)는 매일 오후 6시면 채널을 고정하는 애청자 사이에 ‘들을 만한 음악프로’ 1위로 꼽힌다. 음악과 얘기를 듣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면 주파수를 어디에 맞춰야 할지 방황하게 된다는 ‘배캠프’ 중독자도 꽤 된다.

한글날 ‘아름다운 방송 언어상’ 받은 배철수

배철수(55)씨는 스스로를 ‘이 시대 마지막 디스크자키’라 부르는 음악 프로 진행자다. 1970년대 팝을 붙들고 2000년대를 살고 있는 그 덕분에 대한민국 라디오 프로에서 70년대 FM 시절의 원형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건조하면서도 구수한 그의 음성에 실려 날아오는 말은 때로 독선적이랄 만큼 명쾌하다. 엄선한 음악 사이사이에 입 발린 소리 없고, 두루뭉수리 넘어가는 법 없이 삶이 밴 말을 머뭇거리지 않고 던지는 그에게 남녀노소 청취자들이 ‘이런 프로만 늘어나면 우리 음악 시장도 발전할 텐데…’라는 찬사를 보낸다.

배철수씨의 목소리에 실린 소탈함과 믿음, 정확한 우리말 구사는 PD들 사이에서도 정평이 났다. 이런저런 부탁으로 한 편, 두 편 나서게 된 다큐멘터리 내레이터로도 웬만한 성우 못지않은 평가를 받게 됐다. 편견 없는 시각과 절제된 매무새 덕에 텔레비전 토크쇼 진행자로도 여기저기 불려 다닌다. 한글문화연대가 배씨를 ‘올해의 아름다운 방송 언어상’ 출연자 부문 수상자(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로 뽑은 이유다. 소박하면서도 예쁜 우리말을 정확한 발음으로 잘 가려 구사하는 배씨의 말솜씨는 20년을 코앞에 둔 ‘배캠프’의 장수 비결이기도 하다.

방송인 배철수 이전에 가수 배철수가 있었다. 한국항공대 재학 시절이던 1978년 그룹 ‘활주로’에서 발표한 ‘탈춤’은 통기타 문화가 록 문화로 넘어가는 신호탄이요, 전통음악을 대중음악에 접목한 걸작으로 남았다. ‘활주로’를 이은 록그룹 ‘송골매’ 리더로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어쩌다 마주친 그대’ 같은 히트곡을 내며 음악인으로 10년을 살았다. 하루 15~20곡을 트는 ‘배캠프’의 음악이 늘 싱싱하게 살아 뛰는 데는 밴드를 하며 무대를 달구던 젊은 시절의 경험이 녹아 있다.

배씨는 요즘도 스튜디오 자리 옆에 국어사전을 놓아두고 헷갈리는 단어의 뜻과 발음을 찾아보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방송 두 시간 꼬박 긴장해서 몰두한다. 음악 나갈 때는 꼼짝 않고 음악 듣고 “이 노래 정말 죽여 주죠?” 같은 생생한 멘트를 날린다.

몇 년 만에 들었는데 너무 좋은 노래는 한 번 더 틀기도 한다. 날씨 따라, 사연 따라, 음악 흘러가는 대로 즉석 요리하는 무궤도의 자유로운 팽팽함이 ‘배캠프’가 살아 움직이는 힘이다. 30대 중반에 프로를 시작해 이제 50대 중반이 된 이 남자의 카리스마는 왜 갈수록 더 빛이 나는 것일까. 꼬장꼬장한 몸매에 청동처럼 강하고 변함없는 말솜씨는 저절로 벼려진 것이 아니다. 새 음악 따라 마음 주고, 마음 가면 머리를 움직이는 지혜로 그의 입은 나날이 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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