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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하늘에 무릎 꿇은 스코틀랜드 Murcar GC

중앙일보

입력

영국 동선 중 가장 북쪽 지점이었던 애버딘 끝자락의 Murcar GC에 도착했다. 바로 이 지점에 폭우가 예상된다는 기상예보가 몇 일 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남서부 웨일즈 일대와 잉글랜드 일부 지역은 이미 침수되어 주민들이 대피하는 모습이 헤드라인 뉴스로 나오고 그 비구름이 점점 북상하여 스코틀랜드의 브리티시 오픈까지 위협한다고 하니 비의 규모가 예사롭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디 장사 하루 이틀 하나? 13시 30분부터 장대비가 쏟아진다는 예보에도 게의치 않고 우린 11시 30분 티오프를 받았다. 그저 골프라면 열일 제쳐놓고 매달렸던 한국에서도 기피하던 우중 골프였는데 비의 나라 영국에서는 비에 이골이 났다. 이젠 귀찮아서 우산도 들지 않고 옷이 젖어 몸에 휘감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오히려 짧은 옷들을 골라 입는 경지에 이르렀다.

우중 골프 정복의 일등 공신은 골프화와 장갑이었다. 18홀 내내 뽀송뽀송한 발을 유지시켜주는 탁월한 방수 기능의 고어텍스 골프화와 손바닥에 주황색 고무 칠을 한 목장갑(어쩌다 이 장갑이 골프 가방에 들어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덕분에 비 오는 날마다 아주 요긴하게 썼다)의 미끄럼 방지 기능 덕에 손과 발만은 비에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비록 비가 오면 드라이버 런발이 줄어 비거리에 막대한 손실을 입기는 하지만 그린에 공이 올라가면 딱딱 서주니 전체 스코어도 크게 문제가 없었다.

비를 품고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이 정오의 시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프로샵 매니저는 비 때문에 18홀을 다 치지 못할 수도 있으니 9홀 그린피만 받겠다며 나머지 홀은 서비스란다. 하늘이 정말 예사롭지 않았지만 운명은 하늘에 맡기고 일단 척박한 강호를 향해 출발했다.

Murcar GC. 1909년에 개장하였고 로열 애버딘, 크루덴 배이 골프장과 더불어 스코틀랜드 북동부 지역의 트로이카를 형성하고 있는 골프장이다. 골프장 랭킹으로만 따지자면 스코틀랜드 내에서 20위권에 든다.

코스가 내뿜는 포스가 대단함을 느꼈다. 서서히 해안선으로 다가가 해안 절벽을 따라 펼쳐지는 홀들은 매 홀 그 모습을 달리하며 서부 지역의 링크스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서부지역의 로열트룬이 거친 러프로 시종일관 사람을 압도하는 링크스라면 Murcar는 사람을 쥐었다 폈다 얼르고 달래다 된통 혼을 내는, 강약중강약의 대단한 리듬감과 템포를 가진 코스였다.

특히 7번 홀. 매니저가 시그니쳐 홀이라고 특별히 찍어준 이 홀은 티에서 그린까지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 모래까지 넘어야 도착할 수 있는 대략 난감한 홀이었다. 그러나 매력이 넘쳤다. 드라이버 착지 지점에는 뚝 떨어지는 절벽이 있고, 그 아래에는 얕은 개울까지 흘렀다. 공이 물가에 걸려 있기에 다행이라 생각하며 다가갔더니 개울보다 넓은 진흙 늪이 공을 잡고 놔주지를 않는 것이다. 어찌어찌 이 곳을 탈출해 세컨 샷을 올려치면 페어웨이 법면을 타고 흐르는 깊은 러프와 그린 벙커…. 난감!

코스가 우리를 주무르는 대로 리듬을 타며 12번 홀을 향해 가던 13시 30분, 하늘에서 구멍이 난 듯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영국 기상청은 도대체 어떤 장비를 사용하기에 이렇게 시간까지 정확히 맞추는 것인지……. 한국 기상청에서도 일단 수입하고 볼 일이다.

링크스인 탓에 비를 피할 나무 한 그루도 없었다. 내리 꽂히는 물 화살을 온몸으로 맞으며 억지스레 전진했다. 하지만 결국 세 홀을 남겨두고 퇴각했다. 그 동안 맞아오던 비와는 차원이 달랐다. 뭔가 하늘에 사단이 난 듯 했다.

Murcar 코스는 여러모로 다재다능 했다. 난이도의 안배며, 코스 관리며, 홀 별 차별성이며, 편안한 운영체계며……. 비록 세 홀을 남겨둔 채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지만 그나마 전반 홀을 온전히 끝낼 수 있도록, 터지기 일보 직전의 인내심으로 비를 참아준 하늘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다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