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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을 잡겠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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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자정이 넘은 시간. 한산해야 할 도로가 꽉 막혀 있다. 사고가 난 줄 알았다. “이 시간에는 늘 이래요. 학생을 데리러 온 학부모들의 승용차가 몰리기 때문이죠.” 택시기사가 “그런 것도 모르냐”는 투로 말했다. 며칠 전 서울 강남 학원가 인근에서 겪은 일이다.

이명박 정부가 “공교육을 강화해 사교육비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시장은 거꾸로 가고 있다. 학생들은 학원으로 더 몰리고, 학부모들의 고통은 커져만 간다. 국제중 설립, 자율형 사립고 100개 만들기, 인문계 수능 수리영역 미·적분 추가, 수능 영어 국가영어능력시험으로 대체…. 정부가 제도를 건드릴 때마다 사교육 시장은 들썩인다. 경기가 나빠 씀씀이를 줄여도, 학부모들은 사교육엔 기꺼이 지갑을 연다. 정보가 부족하고 불안하니 학원에 의존하는 것이다.

실제가 그렇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상반기 가정에서 지출한 사·공교육비 총액은 15조339억원이다. 지난해 상반기 13조7772억원보다 9.1%나 늘어났다. 문제는 전체 가계 소비지출 243조9885억원 가운데 교육비 비중이 6.2%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경기가 바닥인데도 말이다.

학원 수는 어떤가. 올 6월 말 현재 전국의 입시·보습학원 수는 3만2400여 개다(교육과학기술부). 노무현 정부 출범 직전인 2002년 말 1만6600여 개보다 95%나 증가했다. 전국의 초·중·고교 수가 1만1100여 개인 점을 감안하면 학원 수가 세 배 가까이 많은 것이다. 올해도 6개월 동안 2000개 이상 늘었다. 기네스북에 오르지 않은 게 다행이다. 올해 사교육 시장 규모는 30조원을 훨씬 넘어 건국 이래 최대가 될 것이라는 학원가의 예측이 나올 정도다.

이 대통령의 ‘사교육비 절반’ 공약을 사실 난 믿지 않았다. 역대 어느 정부도 성공하지 못했고, 현실적이지도 않다고 판단해서다. 대통령도 3녀1남 자녀에게 사교육비 꽤나 썼을 것이다. 첫째·둘째 딸은 미국 대학의 음대, 셋째 딸은 한국 대학의 미대, 아들은 미국 대학에 다녔으니 말이다.

그런 대통령이 최근 ‘학원비’얘기를 했다. “학원비가 크게 올라 서민 가계에 큰 부담이 된다는 말을 듣고 있다. 종합적인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러자 서울시교육청이 “학원비 적정 산출시스템을 도입해 수강료를 뻥튀긴 곳을 손보겠다”며 짝짜꿍을 했다. 학원마다 임대료와 강사의 질, 프로그램이 다른데도 학원비 표준을 만들어 거품을 빼겠다니 그 성의가 가상해 보인다. 대통령의 지시가 없었더라도 평소에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사교육 잡기 ‘특효약’처럼 요란이다. 학원들이 새벽까지 강의하거나(규정은 오후 10시까지), 세금 한 푼 안 내고 고액을 챙기는 음성적인 과외는 손도 안 대면서.

과연 사교육 시장을 잡을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다. 외고나 예고가 전문학원을 다니거나 별도 과외를 받지 않으면 풀 수 없는 문제를 내는 한 그 수요가 줄어들겠는가. 우수 학생이 몰린다는 대원외고에도 밤늦게 학생을 데리러 학원버스가 달려오는 걸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게 마련이다.

정부의 사교육비 절반 정책은 이미 절반은 실패했다. 사교육 양극화도 심화되는 양상이다. 학원 수요를 학교로 끌어들이는 노력과 세부 계획이 필요한데 구호만 거창하게 외친 탓이다. 공교육은 제자리인데 사교육비 절감만 주장하는 것은 시장논리에도 맞지 않는다. 수준별 수업 강화, 방과후 학교 업그레이드, 특목고 입시 개선, 교사평가 시스템 도입, 대입제도의 일관성 유지 같은 피부에 와닿는 일부터 제대로 해보라. 학부모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줄 성의를 보여달란 얘기다. 오늘 시작되는 국감에서 의원들은 우리 교육의 현실을 냉정히 짚어보길 바란다. 학교보다 입시학원이 더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양영유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