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 이광수, 일본 유학 뒤 구세군 병사 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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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구세군이 한국에 온 지 100년이 됐다. 한국 구세군의 역사는 대한본영 초대사령관인 허가두(영국명 로버트 호가드) 정령이 1908년 10월1일 인천 제물포에 상륙하면서 시작됐다. 김준철(69·사진) 구세군 박물관장은 『한국 구세군 100년사』를 펴내고 1일 헌정식을 열었다. 2년 9개월간 전국 각지와 영국 국제본영 등을 답사해 쓴 966쪽의 방대한 기록물이다. 김 관장으로부터 한국 구세군의 발자취를 들었다.

구세군은 1865년 영국 감리교 목사 윌리엄 부스가 ‘넘쳐나는 부랑자들을 돕고 구원하겠다’며 거리 선교를 하면서 생겼다. 부스는 보다 공격적인 선교를 하기 위해 군대 조직을 교단에 차용했다. 그 자신은 군복무를 한 적이 없다.

1907년 부스 일행이 일본 도쿄에서 순회 전도를 할 때 한 조선인 유학생이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파해 달라’라고 요청했다. 이듬해 허가두가 사령관으로 파견됐다. 김 관장은 “춘원 이광수가 그 유학생이라는 설이 있다. 그는 귀국한 뒤 구세군 병사(신도)가 됐다”라고 말했다.

허가두는 기존 개신교단들이 장악한 도시 대신 시골로 선교하러 다녔다. “지금도 다른 교단에 비해 구세군 영문(교회)은 시골에 많은 편”이라고 게 김 관장의 설명이다. 대한제국군 해산(1907) 뒤 많은 퇴역 군인이 구세군의 통역으로 나섰다. 이들은 신도를 모으기 위해 종종 “조선을 해방하러 온 영국 군대”라고 구세군을 소개했다. ‘총과 칼을 준다’라고도 선전했다. 의병에 들어가는 줄 알고 구세군에 가입했다가 탈퇴하는 일이 속출했다. 선교사들은 정위·참령·부장 등 대한제국군의 계급 명칭을 그대로 썼는데, 이 전통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자선냄비는 28년 도입했다. 그해 전국적인 가뭄으로 서울 거리가 걸인들로 넘치자 당시 박준섭 사령관이 영국·미국 등에서 하던 것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성탄절 시즌 전국 20개 곳에서 849원을 모금, 130여 명의 걸인들을 먹였고 매일 아침 쌀을 배급했다. 자선냄비는 태평양전쟁 때인 43~46년과 한국전쟁 때인 52년을 빼고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김 관장은 “자선냄비 모금액은 60년대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증가했다”며 “심지어 외환위기 때도 모금액이 늘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모금액은 30억9700여만원이다. 그는 “구세군은 봉사를 통해 국민과 함께 해왔다”며 “신도 12만의 작은 규모지만 어떤 교단보다 국민의 믿음과 사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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