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인기작가 한수산.박영한.조성기 가을 장편 선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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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70년대 인기작가들이 잇따라 장편소설을 펴내며 가을 독자들을찾아나서고 있다.새벽 안개의 지문(指紋)혹은 마른 잎의 쓸쓸한냄새까지도 담아내는 감성적 문체의 작가 한수산(50)씨는 최근『사랑의 이름으로』를 펴냈다(문학사상사刊).
또 역사와 사회.이웃의 의미에 대해 굵고 묵직하게 묻거나 냉정하리만큼 객관적으로 묘사해 오고 있는 남성적 작가 박영한(49)씨는 『장강(長江)』(창공사刊)을,성(聖)스러움과 성(性)스러움 간의 긴장,혹은 그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관념과 사실성을 두루 갖춘 조성기(45)씨는 『너에게 닿고 싶다』(세계사刊)를 각각 2권으로 펴냈다.
『사랑의 이름으로』는 사랑에서 영혼과 육체는 어느 정도의 「비율」로 조화돼야 하는가를 사춘기에 한번쯤 상상해봤을 선생님과제자 사이의 사랑을 통해 묻고 있다.고등학생 형민은 여교사 신애와 사랑에 빠진다.스승과 제자의 벽을 넘는 운 명적 사랑으로받아들인 둘은 성관계까지로 발전해 나가다 불륜으로 지탄받아 신애는 자살을 택하고 형민은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정신병원에서 나온 형민 역시 자살하려고 신애가 묻힌 섬으로 가는 배 위에서 유희를 만난다.죽음을 눈앞에 둔 남자와 마지막사랑을 불태운 뒤 사랑의 폐허 같은 마음을 안고 섬을 찾는 유희와 서로의 속 깊은 사랑 이야기를 나누며 맺어 지려다 끝내 결별한다는게 기둥 줄거리다.「이제 젊음과 헤어져야만 한다」는 각오로 한씨가 마지막으로 27세의 감성을 퍼올려 풀며 인간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에서의 영혼과 육체의 황금분할점을 쓸쓸히 찾고 있는게 이 작품이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는 무리를 향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고 그 여인에게는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말라」고 엄숙하게 속삭인 예수.이 두 예수의 모습 사이에 걸쳐있는 팽팽한 긴장의 현(絃)을 퉁겨보고 울림을 들어보고 싶었다.』 『너에게 닿고 싶다』는 머리말에서 조씨 스스로 밝힌 이 말이 주제다.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윤리와 사랑의 이름으로 죄를 짓는 현실 사이의 괴리를 외도를 한 중년부인의 비밀스런 내면을 들여다보며 묘파(描破)하고 있다.그러면서 빠른 사건 전개와 사실적 묘사로 소설읽기의 세속적 즐거움도 주고 있는 작품이『너에게 닿고 싶다』다.같은 사랑을 주제로 했으면서도 한씨의 작품이 영원한 20대의 시점이라면 조씨의 작품은 중년의 시점에서 그려지고 있다.
한편 『장강』은 역사의 격동기를 능동적으로 헤쳐나간 한 인간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루고 있다.일제하 함북에서 태어난 이두삼은 일본 유학중 항일단체를 조직하다 발각돼 수감된다.해방후 고향에 돌아온 그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반동으로 몰려 시베리아로 유형된다.유형에서 풀려 돌아오자마자 6.25가 터져 유격대를 조직,인민군과 전투를 벌이다 이두삼은 월남한다.남한 사회에도 환멸을 느껴 은둔해버려 칠순을 넘긴 그에게 남은건 빛바랜 가죽장화와 낡은 기타뿐이다.
작가가 6년간 만나며 주인공으로 끌어들인 이두삼은 실존인물이다.좌우의 이념이나 조직을 떠나 인간을 그 무엇으로부터든지 「해방」시키려한 순백한 낭만주의자들을 격동의 우리 근.현대사는 많이 품고 있다.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도 불리 는 이들은 대부분 이두삼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이데올로기는 변수(變數)고 인간은 상수(常數)』라고 외쳐온 박씨가 이념이 걷힌90년대 좌우 이념에 의해 파묻힌 진정한 인간해방자의 삶과 꿈을 복원한 작품이 『장강』이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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