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9. 최윤칠과 달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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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피아노도 열심히 배웠다. 경동중 6학년 때 학교 음악회에서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연주하던 모습.

 경동중 5학년 때 서울운동장에서 공립중학교 대항 육상대회가 열렸다. 나는 5000m 달리기에 학교 대표로 참가했다. 경복에 최윤칠이라는 선수가 매우 잘 달린다고 소문이 났었는데 그도 5000m에 출전했다. 동기생인 최윤칠은 처음부터 선두로 달렸고, 나는 선두그룹에서 뒤따라갔는데 400m 트랙을 아홉 바퀴 돌고 난 다음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 기권했다. 최윤칠은 나중에 유명한 마라토너가 되어 1950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함기용·송길윤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해방 후 서울에 권투 구락부가 네 개 생겼다. 성북경찰서 체육관에 박용진 사범이 하는 경동구락부, 을지로 2가에 경성구락부, 그리고 종로의 신한·고려구락부였다. 이들은 구락부 대항전을 했다. 경동구락부 소속이었던 나는 설렁탕 한 그릇 먹고 경기에 나섰는데 호되게 얻어맞고 오면 오후 9시까지 뒷골이 울려 공부를 못할 지경이었다. 그런데다 복싱을 하면 코가 삐뚤어지느니, 귀가 찢어지느니 하는 등 주변에서 말들이 많아 복싱은 얼마 하지 않고 그만뒀다.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열심히 탔다. 하키나 피겨 스케이트는 없었고, 롱 스케이트만 있을 때였다. 탈 수 있는 곳도 창경원(현 창경궁) 연못, 한강과 청량리 논두렁뿐이었다. 창경원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며칠 동안 계속 탄 적도 있다. 그런데 작은 스케이트를 신었더니 아킬레스건 근처가 곪아버렸다. 혜화동 여의전병원에서 두 차례 수술을 받고 한 학기를 휴학하는 바람에 스케이트도 그만뒀다.

일본에서 공수도가 들어와 청도관이 생겼고, 만주에서는 당수도가 들어왔다. 경동중 체조 교사로 부임한 윤병인 선생님이 당수 5단이었다. 만주에서 칼을 막다가 손가락을 다쳤다며 늘 하얀 실장갑을 끼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수부를 만들어 운동장에 권서(새끼를 둘둘 말은 기둥)를 세워놓고 지르기 연습도 시키고, 운동회 때는 직접 시범도 했다. 호흡과 발차기·지르기 동작을 귀신처럼 했다. 이때 무술을 배운 게 훗날 태권도에 미치게 된 원인(遠因)이 된 것 같다. 윤 선생님은 그 후 동국대와 YMCA에서 당수부를 만들었으나 나중에 북한으로 갔다고 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무척 열심히 쳤다. 삼선교 인근 연습실에서 신재덕 이화여대 교수로부터 배웠다. 1947년 당시 레슨 요금이 월 2000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문하생은 거의 경기여고·이화여고 학생들이었고, 중학생은 나와 경기중에 다니던 학생뿐이었다. 여고생 10여 명이 뒤에서 보고 있는데 신재덕 선생에게서 야단 맞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지정곡은 안 치고 쇼팽이나 치냐”며 야단 칠 때는 눈물이 났다.

5, 6학년 때는 학교 음악회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다. 서울대 문리대를 나와 KIST 원장을 지낸 이주천도 피아노를 잘 쳤다. 6학년 때 이주천은 쇼팽의 야상곡을, 나는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연주했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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