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8. 신나는 영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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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중 시절 나의 영어 실력을 인정해주셨던 홍재익(앞) 영어 선생님. 선생님 왼쪽이 필자.

욱구중(현 경동고)은 1940년 일본인과 한국인을 100명씩 모집해 설립한 5년제 공립학교였다. 그때 같이 입학한 동창 중에는 최호중 전 외무장관, 이계철 전 버마 대사(아웅산묘소 폭파암살사건으로 사망), 이주천 전 KIST 원장 등이 있다. 내가 입학한 43년에는 4학년이 최고 상급생이었으나 45년 초 5년제에서 4년제로 바뀌는 바람에 4, 5학년이 함께 졸업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전세가 어려워지자 일본이 학생들을 일찍 군대에 보내기 위해 학제를 바꾼 것이다. 선생님은 전원 일본인이었으나 딱 한 분 맹원영이라는 한국인 선생님이 있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일본인에게는 무엇이든 지고 싶지 않았다. 공부 외에 복싱·유도·스케이팅·육상·공수도 등을 연마했고, 피아노 연습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금이었다면 어머니가 공부에 전념하라고 하셨겠지만 당시 모든 면에서 일본 학생에 뒤지지 않는 나를 보고 어머니도 자부심을 가지신 것 같았다.

2학년이 되면서 각종 동원에 끌려 다녔다. 공부하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비행기 연료로 쓴다며 송진을 채취하러 다니기도 했고, 탄약고 만드는 작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45년 8월 15일. 그 날도 나는 안양에서 탄약고 만드는 작업에 동원돼 일하고 있었다. 갑자기 교관들이 전원을 소집하더니 일본이 항복했고, 우리는 다음날 서울로 돌아간다고 발표했다. 안양 시내에서는 만세 소리가 크게 들렸다. 해방 후 욱구중은 경동중학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6년제가 됐다.

나는 원래 영어를 좋아했다. 학교 성적이 전교 1, 2등을 다툴 정도는 아니었지만 영어만큼은 자신 있었다. 해방이 되고 미군이 들어오니 신이 났다. 미군이 주둔한 동숭동 서울대에 매일 저녁 영어사전을 들고 찾아갔다. 미군 보초와 같이 불을 쬐면서 외워간 영어문장을 써먹었다. 기초적인 문장이었지만 미군들은 한국 소년이 영어로 말하는 것을 재미있어 하며 친절하게 대해줬다. 이때 영어회화가 꽤 는 것 같다. 덕분에 영어 시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선생님들의 총애를 받았다.

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길 들었다. 나도 A부터 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D쯤 가면 A는 잊어먹었다. 계속 반복하다가 별로 필요도 없고 해서 E, F쯤 가다 집어치웠다.

영어 선생님 중에 홍재익 선생님이 있었다. 나의 영어 실력을 인정해주시고, 100점을 줄 때가 많았다. 홍 선생님은 내가 외교관이 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이다. 선생님은 나중에 제1회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외무부로 근무처를 옮겼다. 내 선망의 대상이었다.

영어가 점점 중요해지면서 나에게 부탁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여자의학전문학교 학생이나 여고생들의 영어숙제와 시험공부를 도와준 경우도 몇 번 있다. 내 영어 실력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 자체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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