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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 1명 낙오하자 “야, 병력 제대로 챙겨” 불호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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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호 22면

25일 저녁 양소라 대위가 공격 훈련에 나서는 중대 지휘부의 현황을 파악한 뒤 훈련단 본부 통제소에 보고하고 있다. 인제=최정동 기자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뜨며 산속을 행군한 지 몇 시간. 해발 1000m의 차고 습한 안개와 나뭇가지만 느껴진다. 갑자기 얼굴에 차가운 게 닿는다. 앞서 가던 통신병의 무전기다. 어둠 속, 거리감이 없어 너무 다가간 모양이다.앞서가는 병사의 배낭을 살그머니 잡고 더듬거렸다. ‘이러다 길 잃겠다’. 두려움이 스치는 순간. “중대장님! 100m 앞 포병.” “엎드려!” 2~3초 흘렀을까. “꽈광” 포 소리와 섬광이 번득인다. “중대장님 1명 사망, 4명 중상입니다.” 상황 보고를 듣는 양소라 대위(34·11월 소령 진급 예정)가 안타까운 듯 짧은 신음을 터트린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훈련단 관찰통제관 양소라 대위

강원도 인제군 산속에 자리한 육군 한국과학화훈련단(KCTC·Korea Combat Training Center) 실전 훈련장이다.‘마일즈(다중 통합 레이저 체계)’와 위성위치추적장치(GPS) 등 첨단 과학 장비를 이용해 피 흘리지 않고 실전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는 전장의 현실을 체험하는 장소다.

서울 여의도의 15배가 넘는 산악을 누비는 여군 1호 관찰통제관 양 대위를 취재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양 대위는 공격 전투에 투입될 7사단 소속 1개 대대의 한 중대를 맡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밤새 능선을 탄다”며 이재완(준장) 훈련단장이 말할 때 ‘기자가 현장을 봐야지’라며 가볍게 여겼다. 그런데 전날까지 여름 같던 기온이 이날 저녁 섭씨 8도로 뚝 떨어졌다. 비가 오고 안개가 끼고 바람도 불었다.700~1100m 고지를 대비해 아래는 청바지·운동복·야전복 바지 등 3겹, 위는 5겹으로 중무장했어도 한기 때문에 밤새 이를 악물었다. 깜깜한 밤중에 첩첩산중은 어떨까 상상한 적이 있다. 달 없는 날 산중에선 눈을 떠도 감아도 아무 차이가 없었다.

1.실전 훈련에 나선 7사단 소속 병사들이 동료의 얼굴을 위장해 주고 있다. 2.공격 전투에 앞서 막간을 이용해 한 병사가 위장 텐트에서 쉬고 있다. 최정동 기자

양 대위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열흘에 한 번씩 벌써 1년 반 넘게 밤새 산을 탔다. 부하 대위 세 명과 중대를 맡아 초저녁의 공격 준비부터 다음날 오전 11시까지 전투 현장을 함께한다. 투입되는 중대장의 작전을 관찰하며 ‘적당히’ 지도하는 게 임무다.
양 대위의 야전복엔 부착된 장비만도 20㎏. 공격 투입되는 부대는 고도의 전문 훈련을 받은 대항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한다. 사전 시뮬레이션은 없다. 매번 새로운 전투다.

레이저 총이나 모의 지뢰·포탄의 레이저 파편을 맞으면 감지기에 사망·중상·경상이 나타난다. 전력 손실이 즉각 파악되는 것이다. 양 대위는 “자기의 판단과 결정에 부하들의 생사가 갈리는 것을 경험한 대대장· 중대장들이 연습이 끝나면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이날 양 대위의 담당 중대는 투입 직전 대항군의 습격으로 1개 소대 지휘부를 잃었다. 저항이 심해 ‘고지 22’ 공격 계획이 몇 차례씩 바뀌었다. 능선을 타는 행군이 ‘좀 편하네’라고 느껴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대항군이 치고 들어왔다. 중대는 사람 발길 닿은 적 없는 숲을 뚫고 가다 길을 잃기도 했다. 불빛이 새면 곧바로 공격이 들어오기 때문에 지휘부는 판초를 뒤집어쓰고 작전을 짰다.

양 대위는 그럴 때마다 개입한다. “중대장! 대대 지휘부에 행로 변경을 건의한 근거를 설명하라.” 나지막하지만 단호하다. 병사들은 계속'전사'했다. 새벽, 중대 전력은 계속 약화됐다. 중대장은 “미치겠다”고 신음했다. 병사들의 긴장감과 피로도 극에 달했다.

“야, 너네 병력 제대로 챙기고 있는 거냐.” 양 대위가 낮고 날카롭게 추궁했다. 소대 통제관이 “병사 한 명이 저체온증으로 뒤처졌다”고 보고한 뒤다. 그러다 곧 “걱정 마라. 괜찮다고 한다”며 중대장을 위로했다.
척후로부터 무전이 왔다. “중대장님, 저는 사망입니다. 적군 3~4명이 우리 뒤로 산개한 것 같습니다.” 양 대위는 중대장을 질책했다. “사망자가 왜 말을 하나. 철모 벗고 내려가라고 해. 너네 중대는 벌써 네 번이나 규칙을 어겼어.”

양 대위는 1997~2002년 특전사 중 특전사로 불리는 707부대(대테러부대)에서 남자도 하기 힘들다는 스킨스쿠버와 고공 강하훈련을 모두 마쳤고 특전사 여성 중대장도 했다. 그런 그에게 여성 1호 관찰통제관은 당연한 코스다.

“심마니로 전직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하.” 그는 잘 웃었다. 씩씩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했다. 산악 행군을 1년에 2000㎞ 이상 하지만 군인으로서의 행복감을 느낀다고 했다. 행복 바이러스를 주변에 퍼트리는 것 같았다.

“요즘 군대는 자살 방지, 탈영 방지 같은 것에 포커스를 두죠. 군대에서 토익 공부를 하는 것도 말릴 순 없죠. 하지만 신세대든 구세대든, 원해서 왔든 시간 때우러 왔든 군인의 본분이 뭡니까. 국가 위기 시에 전투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이곳은 그런 경험 능력을 갖춰 주는 곳입니다.” 군인의 정도를 걸으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재미가 크다고 했다.

그는 화장을 하지 않는다. 요즘은 여군도 예쁘고 강한 이미지로 부각되는 경우가 많다. “선탠 파운데이션이라도 발라야 되지 않느냐”고 묻자 “여성성을 부인하는 게 아니고요. 여기선 몸에 밴 담배 냄새도 적을 유인할 수 있습니다. 화장품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안 합니다. 하하하.” 그러나 양 대위는 화장하고 꾸미면 아주 예쁠 얼굴이다.

양 대위의 명령법은 독특하다. 이름을 자주 부른다. “성식아, 실전 중엔 소대장이 하는 것을 그냥 놔 둬라.” 이런 식이다. 이성식은 후배 대위다. 친근 리더십이다. 단정한 이목구비처럼 시원하고 담백하고 소탈하고 거침없다. 부하들이 편하게 따르는 이유다.

‘나는 군인이다’는 담백한 리더십이 후배 장교들에게는 매력인 모양이다. 후배인 노근창·이성식·구승민 대위는 “선배는 ‘훌륭해, 사랑해’라는 말을 많이 한다”면서 “사실 우리는 반장님(양 대위는 3소총 반장이다) 팬클럽”이라고 말했다. 좋은 사진 실어 반장님이 결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한다.

노 대위는 “정말 존경한다. 꼼꼼하지만 경직돼 있지 않아 좋고, 솔선수범하니 따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구 대위는 “사실 누나 같죠. 이름을 부르면서 승민아, 이거 이거 해라고 하면 이상하게 더 잘하게 된다”고 말했다. 멀리 있던 양 대위가 한마디했다. “야, ‘까라면 까’라고 하면 니네가 듣니.”

후배들은 “우리는 수시로 ‘반장님, 사랑합니다’고 외치죠. 반장님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군기 좀 잡아야겠다고 합니다. 회식하겠다는 얘깁니다”고 입을 모은다. 양 대위는 “내가 리더십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 선후배 사이의 마음은 춥고 배고픈 산악지대에서 생기는 특유의 동료애 같다”고 했다.

다른 중대와 대항군의 교전으로 길이 막히자 잠시 쉴 틈이 생겼다. 구름 사이로 별빛이 비치면서 주변이 조금 보였다. 며칠 동안 잠 한 번 제대로 못 잤을 이병이 아줌마 기자에게 사탕 하나를 건넸다. 불쌍해 보였나 보다. 눈물이 핑 돈다. 양 대위가 맡은 중대 병력은 대항군의 습격이 시작된 지 6시간이 지나자 40%로 줄었다. 흩어진 중대 병력이 규합됐다. 작전은 일명 ‘오미자 계곡(사실은 산 정상)’ 점령으로 변경됐다. 지뢰 매설 지대를 피해 깊은 산속으로 2시간 우회 행군해 정상에 올랐다.

오전 4시30분. 흰 들국화 군락이 눈앞에 펼쳐졌다. “관찰통제관만 느끼는 희열이 있는데요. 뭔지 아세요? 바로 이 순간입니다. 여명이 밝아올 때 좍 둘러처진 산 능선의 고혹스러운 자태를 보는 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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