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역사] 55. 빛의 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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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해탄은 알고 있다’의 주인공인 아로운(左)과 그의 애인 히데코.

일복이 터졌다고들 했다.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서린 호텔 옆에 목욕탕이 있었다. 틈만 나면 달려가 안마를 받았다.

김기영 감독이 찍은 '현해탄은 알고 있다'시사회가 문화공보부에서 있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갔다. 나한테는 알려오지 않았다. 내 성깔을 알기 때문이었으리라. 원작하고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로 만들어 놓고 겁이 났던 모양이다. 많은 사람이 왔다. 나는 문희석 장관과 같이 앉아 관람했는데 화가 나서 도중에 나와버릴까 했다. 일본 군대 내무반에서 모리한테 얻어맞는 스토리를 따라가야 하는데, 얼토당토않은 군대 조직을 창조해내고 있었다. 특히 폭격이 심한 나고야에서 헌병이 할 일이 없어서 아로운만 쫓고 있겠는가.

끝 장면이 그로테스크했다. 우레 같은 박수갈채가 터졌다. 문장관은 내 손을 꽉 잡으며 "저만하면 됐습니다. 과히 야단치지 마세요"라고 했다. 명보극장은 연일 초만원인 데다 나중에는 학생들 발길까지 이어져 30만명을 넘었다고 했다. 광복 후 처음으로 접하는 일본 영화같다는 호기심을 끌어냈다. 15만명을 넘을 때는 나한테 프리미엄을 주기로 되어있었다. 명동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자니까 김기영 감독이 고무신을 끌고 나타났다. 그는 간신히 제작비를 건졌다고 하면서 150만환 지폐 뭉치를 내놓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제작비의 세배 이상은 벌었으리라는 짐작이 들었다.

어느날 신상옥.최은희씨가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휴전협정 체결 직전, 북에서 고급 장교가 투항해 왔는데 여자 사진을 보이면서 자기 처라고 했다. 정보를 캐내려 하니 여자를 찾아주지 않으면 못 대겠다고 했단다. 그를 잡은 중대장이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자기 처였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 뒷이야기는 하나도 없어요."

"그런 우연이 어디 있어요."

"좁은 땅 아닙니까. 있을 수도 있지요."

"난 흥미 없습니다."

그 뒤 잊어버리고 있었다. KBS에서 10월 프로그램을 써달라고 했다. 뭘 쓰나 하다가 신감독 이야기가 고개를 들었다. 완전히 창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제목은 '남과 북'이다. 주상현.이창환.오정환.정은숙 등 베스트 멤버로 짰다. 한밤중에 박춘석씨한테 전화를 걸었다.

"매우 급합니다. 가사를 불러 드릴게요." 한 시간 만에 작곡한 것을 들려주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가 바로 그 주제가다. 곽순옥이 불렀다. 녹음할 때 조정을 하고 있던 엔지니어가 나를 휙 돌아보았다.

"이상한데요. 우린 불감증이 돼놔서 별 느낌이 없는 편인데, 이건 이상한데요. 될 것 같아요."

나도 그랬다. 벌써 두 볼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 일제시대부터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이산하고 살아왔는가. 38선으로 갈라진 핏줄들. 사진을 내보이며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십니까?"라고 물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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