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좌담-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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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서울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담소하고 있는 로버트 스칼라피노 미국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 명예교수,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 김진선 강원지사(왼쪽부터). [강정현 기자]

 
한국의 비무장지대(DMZ)는 우리 옆구리에 난 아픈 상처다. 그러나 남북 관계와 북한 비핵화의 진전에 따라 DMZ는 새로운 평화지대·문화지대의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숨겨진 보고(寶庫)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미국의 오랜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의 로버트 스칼라피노 명예교수가 강원도가 추진하는 DMZ 평화·경제·문화적 이용에 관한 국제포럼에 참석하러 한국에 왔다. 김진선 강원지사와 함께 DMZ의 평화적 이용과 김정일 이후의 북한에 관한 좌담을 열었다.

참석자 ▶스칼라피노 버클리대 명예교수 ▶김진선 강원지사 ▶김영희 대기자

 김영희=남북을 가르는 DMZ는 냉전의 상징적 흔적이고 한국과 동북아시아의 깊은 정치적 상처라고 하겠습니다. 강원도는 경기도와 함께 분단된 도라는 의미에서 한반도 분단의 축소판이기도 합니다. 분단의 부정적인 유산을 많이 물려받은 강원도가 DMZ를 평화적·문화적으로 이용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스칼라피노=DMZ는 정식 평화협정이 없는 한반도에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을 상징합니다. 남북한 관계뿐 아니라 북·미 관계에서도 그래요. 다른 한편으론 긍정적인 가능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남북한의 지방정부와 비정부기구(NGO)가 교류에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지대입니다.

김영희=남북 협력을 위한 강원도의 활동이 활발해도 북한의 동의와 호응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이건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대화를 통한 남북 관계 개선과 DMZ의 평화적 이용의 선후 관계가 매우 중요한 요인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는 6자회담을 통한 북한의 비핵화 프로세스 이행이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스칼라피노=남북한의 중앙정부가 기본적인 합의에 도달해야 평화에 진전이 올 수 있어요. 그리고 북·미 간의 기본적인 합의도 중요합니다. 과거를 회고하면 북·미 간 대화는 합의가 거의 다 된 것같이 보인 경우가 꽤 많았지만 그때마다 돌출되는 걸림돌을 만나 후퇴하고 다시 대화가 진행되는 과정을 반복해 왔습니다. 그래서 잠깐 대화가 순조롭다고 해결이 임박했다고 낙관할 수 없는 게 북한과의 협상이죠.

김영희=DMZ의 평화적 이용은 이렇게 어려움이 많은 장기적인 프로젝트입니다. 강원도의 DMZ 이용 프로젝트에는 대표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김진선=DMZ의 57%가 강원도에 있는데 이곳은 60년 동안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지키기 위해 희생된 공간입니다. 강원도가 착안한 것은 DMZ를 교류와 협력의 장, 소통의 공간으로 바꾸자는 겁니다. DMZ에 평화와 기록과 역사에 관한 다양한 시설, 예를 들면 DMZ 박물관과 평화공원 등을 건립해 국제 관광 자유지대로 만들자는 거죠. 북한과 함께 북한강을 공동 개발해 이용하고, 철로와 도로망을 놓고 산업지대를 만들어 물류의 축, 교통의 핵심 지역으로 만들자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DMZ인 바다에서도 공동 어장을 만들어 활용할 수 있습니다.

김영희=문제는 남북 교류와 협력은 남북한 중앙정부의 대규모 사업들인데 중앙과 지방이 어떻게 역할 분담을 할 수 있을까요.

김진선=강원도가 추진하는 남북 교류·협력 사업은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아 우리가 재량을 갖고 합니다. 남측 지역에 구축하는 하드웨어는 지자체 단독으로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교통망 공동 개발이나 DMZ에 대한 남북한 공동 조사 같은 건 남북한 중앙정부의 동의와 협조가 있어야 합니다. 남북한 정부를 설득해 공동 과제를 추진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스칼라피노=강원지사가 추진하는 프로젝트들은 공식 채널보다 대화와 협력에 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과 평양이 기본적인 합의를 하지 않는 한 끊임없이 걸림돌에 봉착할 겁니다. 최근 금강산에 간 한국 관광객 총격 사망 사건 이후 이런 점이 표면화됐죠. 또한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완전한 검증을 허락할 것인가가 중요한 열쇠입니다. 몇 가지 간단한 조치 말고 핵 활동에 관한 전면적 검증 말입니다. 북·미의 입장이 특히 날카롭게 대립되는 부분은 완전한 검증의 정도와 타이밍입니다. 타이밍이란 한쪽에서 어느 정도를 하면 다른 쪽에서 얼마만큼을 이에 맞춰 해 줄 것인지입니다. 한 예로 북한은 영변의 비핵화를 80% 진척시켰는데 미국은 40%밖에 경제 제재 해제를 하지 않았다고 반발합니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며 해결이 쉽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DMZ 이용 계획도 비핵화 프로세스에 직접 좌우됩니다.

김진선=남북 교류·협력과 통일 문제 접근은 그동안 중앙정부의 전유물이었는데 분권적·미시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게 우리 생각입니다. 분권적이란 의미는 지방정부와 민간도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미시적이란 의미는 국방이나 정치뿐 아니라 아주 작은 부문부터 교류를 해야 되고 그런 것들이 쌓이게 되면 화해·협력·통일의 기초가 된다는 거죠. 독일 통일의 사례에서도 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스칼라피노=강원도의 접근 방법은 옳은 방향이고,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북한의 권력이 완전히 중앙정부에 집중된 현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어요. 북한에서는 중앙정부가 승인하지 않은 일은 어떤 지자체나 기구도 할 수 없습니다. 북한의 중앙정부는 지금까지 이런 미시적인 협력 분야에서 높은 단계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도 되는 실험적인 대화 시도를 해 왔지만 자신의 이익에 불리한 대화나 협력에는 일절 나서지 않을 겁니다.

김영희=스칼라피노 교수가 지적하신 대로 남한에서는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설 여건이 되어 있는데 반해 북한에서는 중앙정부가 모든 것을 틀어쥐고 있는 비대칭 상황에서 북한의 지방정부와 함께 DMZ 공동 개발 사업을 한다는 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스칼라피노=우리의 문제는 북한의 가장 결정적인 분야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김정일이 최고 의사 결정 구조의 정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도 조언과 데이터를 받아야 할 텐데 그게 어떤 구조로 이루어지는 건지, 군부는 어떤 역할을 하는 건지 우리는 잘 몰라요. 북한의 선군(先軍)과 주체라는 두 가지 슬로건으로 미뤄 짐작하면 앞으로 북한이 좀 더 외부 세계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해 베트남이나 중국과 같은 길을 걷는 게 쉽지 않아 보여요.

김영희=지금 당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이 북한과 한반도의 미래를 좌우할 가장 큰 변수라고 하겠습니다.

스칼라피노=북한에 관한 정보는 신빙성이 없어요. 김정일의 건강은 그동안 여러 차례 문제가 돼 왔지만 이번 경우는 뇌졸중이냐, 움직일 수 없는 상태냐인데 기다려 봐야겠어요. 문제는 김정일이 생존한다 해도 매일 국정을 돌볼 수준의 건강 상태인지 또는 물밑에서 권력 이양이 일어날 것인가입니다.

김영희=김정일 위원장의 건강 이상설을 계기로 한국과 미국, 특히 한국은 포스트 김정일 대책을 구체적으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활발합니다. 개념계획 5029를 작전계획 5029로 격상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어요.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건 중국이 북한의 급변 사태에 어떤 계획을 세워놓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한·중, 미·중 협력을 최대한 강화하는 겁니다. 한국과 미국의 어떤 시나리오도 중국의 시나리오와 무관하게 만들어져서는 현실성이 없어요. 북한은 2000년 대선 때 그랬듯이 미국의 대선 결과를 기다려보자는 입장 같은데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뀐다고 사정이 북한에 유리하게 돌아갈까요.

스칼라피노=개인적으로 아니라고 봅니다. 차기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든 대담하고 새로운 대북 정책은 나오기 힘들어요. 누가 대통령이 되든 미국은 대화와 다자주의적 협력을 지속하겠지만 동시에 검증 가능한 비핵화의 입장은 굽히지 않을 겁니다. 가령 매케인이 당선되면 미국은 중동, 특히 이라크 정책으로 정치·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봤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건 일방주의가 미국에 매우 큰 상처를 줬다는 의미와 같아요. 그래서 매케인이 되든 오바마가 되든 이해 당사국들과 협의해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김영희=스칼라피노 교수께서는 중국이 북한의 급변 사태에 어떤 시나리오를 갖고 있다고 보십니까.

스칼라피노=중국이 북한의 붕괴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중국의 입장에서 걱정되는 점은 첫째 북한 난민이 대량 유입되는 사태이며, 둘째 혹시나 남한이 북한을 흡수 통일해 미국의 영향력이 압록강변까지 확장되는 겁니다. 따라서 북한이 아주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계속 지원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중국이 북한의 유일한 우방인 건 사실이지만 북한 정책과 의사 결정에 대한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김영희=김정일 이후의 북한 권력구조는 어떤 걸까요.

스칼라피노=김정일이 다음달 또는 내년에 사망한다면 집단지도체제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이 와중에 결과적으로 온건파와 강경파 중 어느 쪽이 권력을 잡을 것인지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겁니다. 세 아들 중 누구도 아직 북한을 이끌 준비가 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김정일이 눈에 띄게 회복한다면 지금의 체제가 유지될 것입니다.

김영희=집단지도체제의 틀 안에서 군부가 득세를 한다면 노동당은 소외됩니까.

스칼라피노=노동당은 계속 북한 리더십에 의한 권력 행사의 주요 수단으로 남을 걸로 봐요.

김영희=김 지사께서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을 어떻게 보십니까.

김진선=원칙만 고집하지 말고 좀 더 적극적이고, 유연한 대북 정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스칼라피노=북한이 앞으로 더 강경하고 일방적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이명박 정부의 태도도 지금보다 유연해질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북한이 강경하고 일방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김영희=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정리=최지영 기자 ,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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