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페일린 효과는 끝나지 않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수세로 몰리던 존 매케인 미 공화당 대선후보 진영에 구원투수로 발탁된 세라 페일린은 눈부신 역할을 해냈다. 매케인의 지지율을 끌어올려서 버락 오바마 민주당 대선후보와 백중세를 이루게 했다. 그러나 곧 이어 터져나온 금융위기는 다시 오바마에게 기선을 넘겨주며 페일린 효과는 이미 끝나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까지 페일린 효과의 지속성 여부는 그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 달려 있다는 시각이 강했다. 민주당은 그녀의 자녀 사정을 들먹이며 그를 가정관리도 제대로 못하고 정치에만 올인하는 여성으로 비추려 했으나, 오히려 페일린은 위기를 기회로 역전시키는 역량을 발휘했다.

오래전부터 미국에서 10대 자녀를 둔 모든 어머니는 자식들의 애정생활 때문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자녀를 지켜본다.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서 부모 말을 잘 안 듣는 것은 세계적 공통 현상인데, 워낙 개인주의가 강한 미국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청소년들은 우리나라와 같이 대학 입시에 목매지 않으므로 젊음을 실컷 발산하며 산다. 엄마들은 자녀들이 무사히 청소년 시절을 보내며 조기 임신이나 에이즈 같은 질병을 비켜가기를 염원한다.

그러나 일단 일이 벌어지면 미국 어머니는 이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잘못으로 책하지 않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려 하는 자세를 갖는다.

페일린은 떳떳하게 자기 딸과 약혼자가 비록 나이는 어려도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으로, 또 자신은 그런 아픔을 다 끌어안을 수 있는 어머니로 부각시켰다. ‘하키 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운증후군이 있는 다섯째 아이를 품에 안고 나와 ‘하나님이 준 소중한 선물’이라고 했다. 이로써 그는 일과 가정 두 곳을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꿋꿋한 모성의 이미지로 여성의 표를 끌어 모았다. 여성 유권자들은 페일린에게서 자신들과 비슷한 고뇌를 갖고 있는, 그러나 멋있는 어머니를 발견한 것이다.

페일린의 부적절한 가정관리에 타깃을 맞추었던 민주당의 공략은 빗나갔다. 그래서 그들은 경륜이 빈약한 페일린이 필경 경제·외교·안보 정책에 관해 말실수를 할 공산이 많다고 보고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월가의 금융위기가 일단은 페일린의 불을 꺼주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페일린이 한번 올려놓은 지지율의 효과는 여성 표심에 관한 한 지속적 역량을 발휘할 것이다. 오바마가 힐러리를 부통령으로 지명하지 않은 것은 여성 표심에 관한 한 큰 실책으로 남을 수 있다. 힐러리가 비록 민주당 경선에서는 졌지만, 여성 부문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리더십을 오랫동안 발휘해왔기 때문이다. 경선에 패한 후 힐러리는 오바마에게 러브콜을 충분히 보냈지만, 그는 왠지 그녀를 택하지 않았다. 비록 힐러리가 경선에서 수퍼델리게이트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는 공화당과의 대결이라는 큰 싸움판에서 우선 이겨야 하는 전략 때문이었지 그들이 부통령 지명까지 개입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여론조사는 가톨릭 교도들인 히스패닉의 표가 페일린에게 기울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가톨릭은 대부분 낙태 반대 입장을 취하는데, 다운증후군 막내를 비롯해 많은 자녀를 둔 페일린에게 열성적 지지를 보낸다. 지난 선거에서 가톨릭은 계속 힐러리와 클린턴 편이었었다.

그러나 금융위기가 터진 지금, 힐러리를 택하지 않은 오바마가 외교와 금융 부문에서 클린턴 진영의 구 정치인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새 출발을 다짐한 것이 오히려 득이 될지도 모른다. 앞으로 선거전은 부시의 금융위기 관리가 얼마만큼 효과가 있느냐에 달린 부분이 많다. 그러나 대선 때까지 또 어떤 비상사태가 터질지 모른다. 외교 부문에 핵문제 같은 큰 사건이 터진다면 선거의 전망은 또 달라질 수 있다.

김형인 한국외대 교수·미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