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住持스님 공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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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청도(淸道) 운문사(雲門寺)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집필중이던 일연(一然)이 동정군(東征軍)을 격려하기 위해 경주(慶州)에 행차한 충렬왕(忠烈王)의 부름을 받은 것은 1281년6월이었다.그때 일연은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버린 황룡사(皇龍寺)의 황량한 모습과 돈으로 승직(僧職)을 사고 파는 불교계의 타락상을 목격하고 크게 실망했다.
그때의 알현으로 왕의 신임을 얻어 대궐에 들어간 일연은 이듬해 3월 국존(國尊)으로 책봉되기에 이르렀으나 노모(老母)를 핑계삼아 곧 고향인 경산(慶山)으로 낙향했다.노모가 별세한 뒤조정은 일연에게 군위(軍威)의 인각사(麟角寺)를 주재토록 배려했다.이 절에서 일연은 『삼국유사』를 마무리지었으며,당시의 선문(禪門)을 망라한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두차례나 개최했고 1289년 7월 이곳에서 입적(入寂)했다.
인각사는 신라 선덕여왕때(643년) 원효(元曉)가 창건했지만불교계에 환멸을 느낀 일연이 말년에 『삼국유사』를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 중흥의 본거지로 삼으려 했다는 점에서 우리 불교사에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조선조 중기까지만 해도 총림법회(叢林法會)가 자주 열리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차차 잊혀져가는 사찰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최근 인각사가 신문광고를 통해 주지스님을 공채키로 했다는 사실은 그런 까닭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50년대까지만 해도 주지자리는 맡지 않으려 서로 미루거나 서열대로 돌아가면서 맡는 「봉사직」에 불과했지만 60년대 이후의 주지자리는 불교계에선 돈과 권력과 명예를 한꺼번에 안겨주는 「잿밥」으로 인식돼 왔기때문이다.그래서 법력(法力)이 제일 높아야 주지스님이 된다는 터무니없는 인식이 신도들 사이에 만연했던 것도 불교계 전체의 부조리와 무관하지 않다.
본래 말사(末寺)주지의 임명권은 본사(本寺)주지에게 있으므로인각사도 그 본사인 은해사(銀海寺)가 임명하게 돼 있지만 은해사는 승력.학력.일연의 연구업적등을 조건으로 말사의 주지스님 찾기에 나선 것이다.임명권의 포기 자체가 파격적 이거니와 이번공채가 퇴락한 인각사를 복원.성역화하는등 불사(佛事) 추진에 성공을 거둘 경우 주지스님 공채방식은 불교계 전체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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