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미술품 경매도 ‘블록버스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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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런던 사무실에서 만난 데미언 허스트左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자 그는 자신의 매니저 프랭크 던피에게 장난스럽게 덥석 안겼다. 두 사람은 거의 부모 자식뻘의 나이 차이에도 친한 친구 같았다. [런던=권근영 기자]

낙찰률 97.76%, 낙찰총액 1억1147만 파운드(약 2282억원·수수료 포함).

데미언 허스트(43)가 15∼16일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세운 기록이다. 그는 이틀간의 경매에 최근 2년간 만든 223점을 내놔 218점을 팔아치웠다. 첫날 이브닝 세일부터 이미 1993년 피카소 경매에서 수립된 단일 작가의 경매 최고 기록(88점, 총 1300억원)을 가볍게 경신했다.

생존 작가가 화랑을 거치지 않고 신작을 대거 경매에 내놓은 것은 이례적이다. 때마침 터진 리먼브러더스와 메릴린치 사태, ‘기존작들을 재탕한 떨이 세일’이라는 비아냥도 딛고 허스트는 세계 미술경매사를 다시 썼다.

이 ‘블록버스터 경매’를 이끈 이는 그의 매니저 프랭크 던피(70)였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2년 전 던피가 이 이례적 거래방식을 제안했을 때 허스트는 회의적이었지만 던피는 ‘크게 가자’고 끈질기게 설득했다”고 보도했다.

세간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 키 큰 백발 노인은 13년째 허스트의 자산 관리자로 일하고 있다. 그는 코코 더 크라운, 피치스 페이지 등 연예인들의 자산 관리를 하던 중 95년 런던의 한 클럽에서 허스트를 처음 만났다. 영국 최고의 미술상인 터너상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당시의 허스트는 파티에서의 기행으로 주간지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천방지축 예술가였다. 던피는 첫눈에 그가 돈 몰이를 할 거라 직감하고, 허스트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이후 그는 회계업무뿐 아니라 다방면에 걸친 허스트의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 98년부터 2003년까지 허스트는 ‘약국’이라는 간판을 건 식당을 운영했다. 이 식당이 문을 닫자 소더비가 던피에게 접근, 식당의 물품들을 경매에 올리자고 제안한다. 허스트는 망설였지만 던피가 밀어붙인 끝에 이 경매는 230억원 상당의 낙찰총액을 달성하며 히트를 쳤다. 통상 50%가량 수익을 나누는 화랑과의 계약에서 허스트가 90%를 가져가도록 한 것도, 허스트의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남서부에 있는 5개 스튜디오의 160여 명 조수를 꾸리는 것도, 허스트 소유의 4500억원 상당 미술품과 영국·멕시코에 걸친 50곳의 부동산을 관리하는 것도 바로 던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름알데히드를 채운 수조에 넣은 상어, ‘킹덤’은 15일(현지시간) 이브닝 세일에서 190억원에 팔렸다. ‘황금송아지’(215억원) 다음으로 높은 가격이었다. [런던AP=연합뉴스]

허스트는 런던의 화랑 화이트큐브, 뉴욕의 화랑 가고시안과 거래하는 거물급 작가다. 이번 경매가 화제가 된 것은 이들 화랑을 무시하고 최근 2년간의 신작을 통째로 내놓았기 때문이다. 화랑에 수익 배분 없이 작가가 바로 낙찰금액을 가져가며 기업형 현금몰이를 했다. 화이트큐브의 제이 조플링 대표, 가고시안의 레리 가고시안 대표는 ‘물먹었다’는 세간의 루머에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경매에 나타나 적극 응찰했다는 후문이다.

경매는 한 순간의 공개시장, 이 도박이 실패하면 허스트의 시장 가격 및 세간의 관심은 급속히 냉각됐을터다. 이미지 손상뿐 아니라 재산상 손실마저 감수해야 할 판이었으니 두 화랑주 역시 자의든 타의든 함께 부담을 지게 됐다는 분석이다. 결과는 허스트·던피 콤비의 한판승,‘세기의 경매’는 이렇게 유력 화랑주들까지 쥐락펴락하며 신기록을 세우고 마감했다. 미국발 금융 충격도 이들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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