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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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비밀화원 가득히 꽃은 넘쳐 피고 또 피어서 그 진한 흐드러짐을 가누기 어려운 때가 많았다.꽃무더기는 투명하게 이글거리는 숯불덩이처럼 뜨거웠다.이성이나 지성을 깔보듯 당당하게 기승부리는 「독립지대」.그 서슬에 을희는 다만 망연할 뿐 이었다.
옛 아낙네들은 이런 때 목근(木根)을 썼다던가.
소나무로 깎은 남근 모양새의 목근을 침모(針母)들의 바느질방에서 본 적이 있다.
을희는 시골 대갓집 고명딸이었다.아흔아홉칸 집엔 마당도 넓고방도 여럿이었으나 침모들의 방이 어린 을희의 단골 놀이터였다.
우선 고운 비단이 많았고 갖가지 깜찍한 수를 놓은 골무도 을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게다가 인두 화로 재 안엔 밤이랑 고구마가 숨어있어 군것질도 할 수 있었고,바느질 솜씨만이 아니라 말솜씨도 좋은 침모 하나는 옛이야기를 군고구마보다 더 구수하고달콤하게 들려주곤 했다.
하루는 그 침모의 반짇고리를 뒤지다 얄따란 조각보에 싸인 나무토막이 굴러져 나왔다.
『에그머니나!』 얘기꾼 침모가 기겁을 하며 나무토막을 주워 치마 밑에 감추자 다른 침모들이 까르르 웃어댔다.
『뭔데?』 을희는 침모를 힘껏 밀치고 치맛자락 속의 나무토막을 찾아냈다.
미끈히 깎아 다듬어진 소나무 막대기의 한쪽 끝은 뭉툭했고 금붕어처럼 볼록한 눈알 두개가 깎아 돋워져 있었다.
『뭐야! 물고기 인형이야?』 을희의 말에 침모들은 한바탕 또자지러지게 웃었다.
『네,애기씨.물고기 인형 맞아요.이리 주세요.쇤네 거니까요.
』 『싫어! 내가 가질래.』 얘기꾼 침모가 사정했으나 을희는 나무토막을 꼭 쥐어 등뒤에 숨겼다.손아귀 안의 나무토막은 따스했다.단단하면서도 따스한 그 감촉이 지금도 선명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이 목근이었다.착실히 실물 크기였다.
「금붕어 눈알」은 남근의 혹을 본뜬 것으로 쾌감을 더하기 위한장치였다.
경주 안압지(雁鴨池) 출토품 중에도 똑같은 혹박이 나무 남근이 있다.길이 17.3㎝.
안압지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대왕이 지은 궐 안 연못이다.옛날 궁녀들도 빈 규방의 밤을 달래기 위해 이같은 목근을 썼단 말인가.1천2백여년전 일이 바로 엊그제인듯 여겨졌다.
궁궐에서,판잣집 셋방에서까지 오랜 세월 여자를 괴롭혀온 「공동(空洞)」이 두려웠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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