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獨.佛語강좌 폐지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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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사례1:90년12월 노태우(盧泰愚)당시대통령이 옛소련을 방문했을 때 베를린특파원이던 필자는 모스크바 시민들의 반응과 전문가들의 견해등 소위 「외곽취재」를 위해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당시 하루 세끼를 죽과 약으로 때워야 할 정도의 위궤양에 시달리던 필자는 두툼한 약봉지를 따로 챙겨갔지만 금세 동이 났다.수구레같은 스테이크나 들풀처럼 뻣뻣한 야채등 극도로 조악했던모스크바의 먹거리는 음식보다 약을 많이 먹게 만 들었기 때문이었다.약 없이는 몇시간도 버티지 못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같이 간 연합통신 특파원의 약까지 빌려 먹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해 약을 사러 나갔다.모스크바 시내를 온종일 뒤져 외제약 파는곳을 겨우 찾았다.모스크바시립병원의 약국이었는데 달러나 마르크화만 받는 곳으로 모스크바 시내에서 유일한 곳이었다.
화사한 금발머리의 미녀 약사가 나왔다.독일어로 위장약을 달라고 했더니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영어로 얘기했더니 이번엔 양손바닥을 뒤집어 어깨만 추스를 뿐이었다.위궤양이란 뜻의 의학용어인 영어의 『얼서(ulcer)』,독일어의 『울쿠스 (Ulkus)』를 아무리 외치고 배를 가리키며 아프다는 시늉을 해봤지만 막무가내였다.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으로 「ulcer」를 프랑스어식으로 강하고 또렷하게 발음해줬다.『윌.세.르-.』그러자 정말 거짓말같은 일이 일어났다.약사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독일제와 프랑스제 위장약 서너가지를 내놓는 것이었다.
약 한보따리를 사고 마르크화를 내면서 거의 못하는 프랑스어로물어봤다.『파흘레 부 프랑세?』대답은 간단명료했다.『위(Oui)』그녀가 할 수 있는 외국어는 프랑스어 뿐이었다.
사례2:91년1월 걸프전을 취재하기 위해 텔아비브에 갔다.전세계에서 모인 기자들의 하루 일과는 이라크가 쏜 미사일이 터지면 브리핑을 듣고 이를 송고하면서 끝난다.일과를 끝낸 기자들은자연스레 호텔 스탠드바에 모여 맥주나 음료수를 한잔 나누며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물론 영어가 공용어다.
그날도 일과를 끝내고 맥주 한잔하고 있는데 옆자리의 독일기자가 좀 이상하게 생긴 전화기로 열심히 보도하고 있었다.독일 제1TV ARD방송의 이스라엘 특파원인 슈라이버기자였다.당시 선보이기 시작한 위성전화로 8시 종합뉴스에 이스라엘 사태를 생중계하는 중이었다.일을 마친 그에게 다가가 슬쩍 말을 건넸다.물론 독일어였다.그랬더니 이 양반 되게 좋아했다.『어느 나라에서왔느냐』『독일어는 어디서 배웠느냐』….동양인 기자가 독일어를 한다는 약간의 「의외」가 그의 기분을 좋게 한 모양이었다.군사전문가.중동문제전문가.대학교수등 20여명의 명단과 전화번호를 그자리에서 알려주는 것이었다.마침 취재원이 궁했던 터라 그의 이러한 호의를 아주 요긴하게 써먹었다.
이러한 개인적 이유에서가 아니라도 제2외국어,특히 독일어와 프랑스어의 중요성을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외치는 「세계화」의 가장 중요한 무기는 바로 외국어다.영어도 중요하지만 독어.일어.프랑스어등 제2외국어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마당에 교육방송(EBS)이 9월부터 독어와 프랑스어 강좌를 폐지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참으로 섭섭하다.예산부족이 이유다.하기야 돈이 없어 유능한 PD들을 다른 방송사에 빼앗기는 판에 EBS를 비난만 할 수도 없다.그러나 이는 어쨌든 잘못된결정으로 당장 재고돼야 한다.
EBS가 멤버십카드를 발행하는등 재정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자구책을 강구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결국 정부가 나서야 한다.
공사화를 추진하든,수신료를 받게 해주고 광고방송을 허용하든 EBS를 살리고 제2외국어 강좌도 살려야 한다.「세 계화」를 구두선(口頭禪)으로 끝내지 않으려면….
유재식 (대중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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