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12.12사건 19차공판 지상중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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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張泰玩)전수경사령관.정승화(鄭昇和)전육참총장.백동림(白東林)전합수부수사1국장에 대한 증인신문이 진행됐다.
이날 공판에서 張씨는 12.12 직후 부친이 숨지고 아들이 자살한 대목을 진술하면서 울먹이기도 했으며 군후배인 전직 대통령들에 대해서는 『30년간 군복을 입고 생활한 선후배가 법정에서 만나게돼 안타깝고 위로의 말을 못해 미안하다』 고 말하기도했다. ◇노재현 ▶검찰신문 -10.26사건 다음날 정승화총장으로부터 사건 당시 김재규(金載圭)중앙정보부장의 초청을 받아 鄭총장 자신도 궁정동 안가에 있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까.
『27일 새벽에 보고받았습니다.』 -전두환(全斗煥)피고인은 이 법정에서 12월12일 이전에 증인에게 鄭총장 연행에 대해 3~4차례 건의했다는데 사실입니까.
『건의받은 적이 없습니다.』 -당시 장관으로서 鄭총장 연행에대한 사후재가를 않고 계속 버텼으면 됐을텐데 굳이 재가를 해준이유가 뭡니까.
『유혈충돌등 사태가 악화될 우려가 크고 당시로선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가지 사정때문에 재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재판장 신문 -12.12당시 증인은 총장연행 직후 단국대.육본벙커.미8군등지로 도피중이었는데 대통령에게 사태에 대해 곧바로보고할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윤성민 육참차장이 대통령에게 일부 상황을 보고했다는 얘기를듣고 좀더 자세한 사태파악을 위해 보고를 하려다 보니 늦었습니다.』 -1공수여단의 출동사실을 보고받고 합수부측에 병력을 동원하지 말 것을 지시한 적이 있습니까.
『병력이 이미 출동돼 있고 지시내릴 시간적 여유도 없어 못했습니다.』 ◇장태완 ▶검찰신문 -79년12월12일 全피고인이 수도권지역 장성들을 30단에 모이게 하고 증인과 정병주 특전사령관등은 연희동 한정식집에 초대하는등 동시에 두곳에서 약속한 사실을 아셨나요.
『전혀 몰랐습니다.』 -全피고인이 12.12 당일 증인과 鄭특전사령관등을 동시에 식사초대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만약의 사태에 대비,유인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식사초대를 한것 같습니다.』 ▶재판장 신문 -유학성장군과의 통화시 매우 흥분한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는데 아무리 계엄사령관이라도 연행될 이유가 있는지 상세히 알아봤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30분간이나 여러 장군과 통화했습니다.』 -김진기헌병감과 대통령공관을 습격해 崔대통령을 수경사로 모시는 방안을 상의한적있습니까.
『예.』 -12일 오후10시쯤 수경사 전 장교를 소집해 30단 장성을 무조건 사살하라고 공격명령을 내린 적이 있습니까.
『그런 방침으로 준비하라는 취지였습니다.』 ◇정승화 ▶검찰신문 -盧국방장관이 증인에게 김재규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는데도 증인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단지 김재규를 보안사 안가에 모시라고만 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전부 조작된 얘기입니다.체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전두환사령관에게 10월28일에야 증인이 당시 시해현장 부근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힌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수사보고를 받고서야 제가 있었던 곳이 시해현장 부근임을 알게돼 놀랐으며 당시 盧장관에게 「그런 장소가 있는줄 알았냐」고물었더니 장관도 금시초문이라고 대답할 정도로 낯선 곳이어서 뒤늦게 알게됐을 뿐입니다.』 -10월29일 보안사령관에게 증인에대한 조사를 직접 하라고 지시했다지요.
『정확한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본인도 조사를 철저하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자청했습니다.』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전두환보안사령관의 경질을 건의한 사실이 있나요.
『그렇습니다.』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연행돼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지는 않았나요.
『다음날 오전9시부터 고문실에서 철제의자에 묶인채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백동림 ▶검찰신문 -10.26사건에 대한 합수부의 수사결과 鄭총장은 10.26사건과 무관하고 김재규의 단독범행이라는 결론을 내렸지요.
『그렇습니다.』 -당시 증인을 비롯해 합수부 수사관들은 鄭총장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조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으나 鄭총장을 강제연행해 조사할 생각까지는 해본 적이 없지요. 『그렇습니다.』 김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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