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전부 부부장이 빈에서 내게 전두환 암살 지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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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 10면

-아버지가 이런 사태를 받아들이셨나.
“군인이었던 아버님은 태권도에 일생을 던진 단순한 분이라 ‘설마 태권도를 김일성주의를 전파하는 데 이용할까’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아버지와 나는 남한이 ITF 사범 양성을 위한 인력을 제공하지 않으니 (북한과) 공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34년 만의 귀국 앞둔 최홍희 아들 최중화 단독 인터뷰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의 개입 증거는.
“북한 기관들끼리 ITF 활용 방법을 놓고 주도권 경쟁을 벌였다. 처음엔 체육성이 담당했지만 결국 통전부가 승리했다.”

-북한의 지원으로 ITF가 얼마나 확장됐나.
“100여 개국이 협회에 가입했다. 그런데 ITF와 북한의 관계가 깊어지자 탈퇴하는 움직임도 거셌다. 그 과정에서 (북측이) 해외 사범들에게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못 가르친다’며 김일성주의를 전파하려 해 아버지가 자주 노하셨다.”

전두환 전 대통령 암살 기도
-이 사건에 어떻게 개입됐는지 다 드러나 있지 않다. 설명해 달라.
“1981년 2월 (오스트리아) 빈의 북한 대사관에서 최승철 부부장에게 암살 지시를 받았다. ‘마피아 친구를 이용해 광주사태 유가족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게 하라’고 했다. 내게 마피아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당시 박정태 사범이 최승철에게 보고했기 때문이다. 나는 캐나다로 돌아가 유대인 마피아인 찰스 야노버와 만났고 그는 OK했다.

이후 81년 5~6월에 걸쳐 빈·마카오 등지에서 광주사태 유가족으로 위장한 북한 공작원들이 야노버와 암살을 논의했다. 나는 이들을 소개하고 본의 아니게 통역을 맡았다. 음모 내용은 ‘81년 7월 6~8일 필리핀 프레르토아즐 골프장에서 마르코스와 전두환 대통령이 골프를 칠 때 잠복해 있다가 암살하고 반군 본거지인 민다나오 섬으로 탈출한다’는 것이었다. 야노버는 100만 달러를 요구했고 나는 선불 60만 달러를 81년 7월 초 제네바 ‘스위스은행’의 야노버 구좌로 입금했다. 그런데 날짜가 돼도 아무 일이 없었다. 야노버는 ‘시기가 나쁘다. 다음에 하겠다’며 60만 달러를 더 요구했다. 나는 ‘네가 직접 협상하라’고 한 뒤 손을 뗐다. 야노버는 캐나다 경찰에 체포돼 2년형을 선고받았다.”

-다른 암살 계획은.
“통전부가 태권도 사범에게 지시해 두 차례 더 있었다. 내가 알기론 통전부가 최소한 세 차례 전두환 암살 기도를 했다.”(최씨는 자신이 가르친 사범들의 이름을 거론하기 싫어했다. 한 관계자는 “통전부 김우종 부부장(당시 85세)이 박정태 사범에게 81년 2월 미국을 방문하는 전두환 대통령의 암살을 계획하라고 지시했으며, 한삼수 사범에게는 81년 10월 여의도 국군의 날 행사 때 암살을 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이 시도들이 실패하자 작전부가 직접 나서 83년 아웅산 사건을 일으켰다.)

평양에서의 공작교육
-암살 실패 뒤 어떤 경위로 평양을 가게 됐나.
“아버지가 82년 초 ‘급히 여기(캐나다)를 떠나야 된다는 연락이 왔다’고 했다. 북에서 알려온 것이다. 서둘렀다.”

-평양에서 뭘 했나.
“의암초대소에서 공작 교육을 받았다. 처음엔 대접인지 교육인지 몰랐다. 학습하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왔다. 여권도 뺏긴 상태고 시간도 남아돌아 동의했다. 처음엔 사회주의 경제와 철학, 주체사상 같은 것을 배웠다. 첩보 영화 ‘이름없는 영웅들’을 비롯해 매일 두 편의 공작 영화를 2년 동안 지겹게 봤다. 우리 부부에게 사격 연습을 시켰고, 만삭이 된 아내와 함께 야간에 불을 끄고 권총 조립을 하라고도 했다. 83년 6월 노동당에 입당했다. 그래도 나는 이용당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다음엔 무엇을 했나.
“83년 10월 최승철의 지시로 유럽으로 나왔다. ITF 기획차장이 됐다. 본부는 점점 더 북한의 앞잡이가 됐다. 유고·폴란드에서 피복공장과 태권도복 판매를 하며 태권도 보급과 현지에 있는 북한 사범들을 지도했다. 그 공로로 국기훈장 2급(87년)과 공로메달(89년)을 받았다.”

-캐나다로는 왜 돌아갔나.
“항상 돌아가고 싶었는데 마침 아버지가 그러라고 했다. 먼저 캐나다 검찰 측과 합의했다. 6개월만 살라고 하더라. 법정에서 북한과의 관계는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피해가 가기 때문이다.”(최씨는 6년형을 선고받았다가 ‘캐나다인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모범을 보여 1년 만에 가석방됐다.)

통전부와의 관계
-당시 통전부 인물들을 말해 달라.
“총괄 담당으로 전경남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인 2000년쯤 나는 ‘남한으로 가겠다. 정리할 일이 있다’고 빈의 이용선에게 통보했다. 그러자 전경남이 평양에서 캄보디아로 달려왔다. 고위 인사가 그렇게 나오는 건 드문 일이라고 했다. 전경남은 ‘남한에 가면 우리와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고 협박했다. 아버지는 전금철의 관리도 받았다. 나는 최승철·이동식이 맡았다.”

-이용선이 실세라고 했는데.
“90년대 초 30대의 젊은 나이에 빈으로 파견돼 왔다. 지금은 45세쯤 된다. 북한 공작원 양성소인 김정일 정치군사대학 전투원 출신이다. 통전부의 핵심 요원이며 부인 이성심(43)은 해외요원 감시 임무를 맡고 있는 국가보위부 요원이다. 재정차장·국장·사무총장·집행부국장 등 핵심 업무를 해왔다. 장웅 총재를 ‘장 선생’으로 하대하는 ITF의 진짜 실세다. 장웅이 ‘소리 안 나는 총으로 저 놈을 쏴 버리고 싶다’고 말할 만큼 오만하다. 술을 좋아하고 자유 사조에 물들었으며 혼자 시내를 돌아다니기도 하더라. 미국에서 살고 싶다는 말도 했다. 2007년 4월 북한 ITF 태권도 시범단에 포함돼 장웅과 함께 서울을 방문했었다.”

-그렇다면 80년대 이후 ITF는 통전부의 전위대였다고 할 수 있나.
“100% 그렇다.”

-통전부가 ITF에 반한 단체 결성을 지시했다고 들었다.
“그랬다.”(그는 사범들의 이름을 거론하기 꺼렸다. 당국자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89년 박정태 당시 ITF 사무총장과 한삼수 사범에게 캐나다에서 조국통일촉진회 결성 지시. 82년 7월 독일의 원병호 사범(당시 61세)에게 ‘재독 한인 반전반핵연맹’이라는 반한 단체 조직 지시. 94년 조대성 사범에게 ‘조국통일 워싱턴 연합회’ 결성 지시. 95년 6월 ‘북미조선 친선협회’ 조직 지시. 95년 1월 스웨덴의 임원섭 사범(당시 65세)에게 ‘배달민족 평화통일 촉진회’ 결성 지시 등. 이들 단체는 모두 결성돼 반한 활동을 했다.)

-북한에서는 얼마나 자금을 지원했나.
“아버지는 ITF 운영비로 수천만 달러를 요구했다. 통전부는 몇 년에 걸쳐 나눠 줬다. 북한은 매년 30만 달러가량의 조직 운영자금과 120만 달러가량의 세계대회 경비를 지원했다고 들었다.”

-부친 사망 후 ITF가 분열된 이유는.
“2001년 이탈리아 리미니에서 열린 ITF 13차 총회에서 문제가 생겼다. 6년 임기 총재에 다시 당선된 부친이 돌연 2003년 은퇴를 선언했다. 아버지가 북한 압력에 넘어간 것임을 알았다. 소장파가 반발했고 ‘나머지 4년은 현 사무총장인 최중화가 총재가 돼 맡는다’는 안이 제출돼 채택됐다. 아버지와 아들이 자리를 놓고 다툰 꼴이 됐다.”

-그런데 왜 조직이 분열됐나.
“그런데 6개월 뒤 북한이 비밀리에 빈 총회를 개최했다. 내 지지자에게는 ‘사적 회의’라며 참석하지 못하게 막았다. 나는 ‘비합법 총회에는 참석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나왔다. 그러자 총회 결정으로 나를 사무총장에서 해임했다. 아버지는 우셨다. 뒤에 ‘ITF 제명’이 서면으로 통보돼 왔다.”

-아버지의 속뜻은 어디에 있었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3개월 뒤인 2002년 9월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추모회가 있었다. 그런데 5분간 휴식하는 사이 추모회 플래카드가 비상총회로 바뀌었다. 거기서 한국말로 ‘장웅 ICO 위원을 총재로 추대한다’는 안건이 상정됐다. 통역도 없었다. 추도식으로 알고 참석한 외국인들이 멍한 사이 박수로 통과됐다. 나는 2001년 리미니 총회의 결정을 계승한 ITF의 정통 총재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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