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북카페] 굶주렸던 어린 시절 책이 있어 행복했지만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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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독서
김열규 지음, 비아북
316쪽, 1만4000원

 “나의 성장기는 굶주림의 시대였으나 책이 있어 너무 행복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풍요롭지만 정신과 교양은 굶주림의 시대다.”

원로 국문학자이자 민속학자인 김열규(77) 서강대 명예교수가 평생에 걸친 독서 이력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문학과 미학, 신화와 역사에 걸쳐 한국인의 문화를 추적했던 그다. 일제 강점기, 해방, 전쟁, 고도성장기를 거쳐 21세기를 목도한 이 노학자가 펴낸 독서 이력은 그의 삶에 투영된 한국 현대 지성사의 지적 편력이기도 하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돼있다. 1부에 해당하는 ‘책, 내게로 오다’는 김 교수의 유년 시절부터 소년-청년-노년에 걸친 장구한 독서 오디세이다. 그는 할머니·어머니로부터 전해진 옛날 이야기의 생생한 기억을 독서의 범주로 재해석한다. 여성이라는 ‘변방의 목소리’가 문자의 매혹적인 세계로 그를 안내한 것이다. 어머니·할머니로부터 이어진 ‘옛날 이야기’의 서사적 끈끈함을 잊어버린 요즘 세대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마지막 축복이기도 하다.

또 적적한 겨울밤 가족이 잠든 뒤, 방 한 켠에서 설움을 실어 ‘언문 제문(諺文祭文)’을 읊던 어머니의 낮은 목소리를 그는 기억한다. 언문 제문이란 경상남도 중서부 지역에 전해지는 여성의 제문이다. 친정 부모의 영전에 출가한 딸이 바치는 제문으로, 돌아가신 이의 간단한 전기와 자식의 마지막 인사를 한지 두루마리에 붓으로 적는다. 딸은 이 제문을 읽으며 부모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한다.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것뿐 아니라 대신 써 주기도 했던 다른 이의 언문 제문까지 모아뒀고 적적한 날이면 이를 꺼내 읽곤 했다. 이러한 유년 시절의 ‘듣기’로부터의 그의 독서는 시작됐다. 그에게 ‘책’은 학문의 수단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글 이상의 무엇이었다.

2부에서는 저자가 터득한 책 읽기 방식을 소개했다. 꼼꼼한 책 읽기인 ‘클로즈 리딩’으로 ‘적게 넣고 많이 씹을 것’을 권장했다. 적게 넣고 많이 씹어야 소화가 잘 된다는 지적이 아니다. 그래야 먹거리가 제 맛을 낸다는 뜻이다. 하나의 문장, 한 개의 낱말조차도 머릿속에 새겨질 만큼 ‘책의 맛’을 탐미하라는 것이다.

물론 현대 사회의 홍수 같은 정보를 따라가기 위해선 ‘속독’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응급수단으로 책의 차례-서론-본론을 펄펄 뛰듯이 날려 읽는 ‘삼단 뛰기’ 방식을 저자는 권한다. 여기서는 요점만 두세 문장으로 잡아내고 책의 결론을 차근차근 살피라는 것이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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