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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도시 사로잡은 일본판 ‘인어공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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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지난달 27일 이탈리아 베니스의 리도 섬에서 제65회 베니스국제영화제가 개막했다. 올해의 개막작은 조지 클루니·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코엔 형제의 최신작 ‘번 애프터 리딩’. 영화제측은 이에 앞서 올해로 만 100세가 된 포르투갈의 거장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의 신작 단편을 상영했다. 노(老) 대가의 평생에 걸친 업적에 경의를 표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6일 폐막을 앞둔 베니스영화제 소식을 전주국제영화제 유운성 프로그래머가 전해왔다.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로 제65회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右). ‘포뇨’는 주인공 물고기의 이름이다. [베니스 AP=연합뉴스]

올 베니스 경쟁부문에는 총 21편의 장편영화가 초청됐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거장들의 신작보다는 자국 바깥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중견 감독들과 갓 명성을 쌓기 시작한 신진들의 작품이 다수다. 전반부에 공개된 영화들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는 이곳 관객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인어공주 동화에 바탕을 둔 이 작품은 일본 국내에서도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하며 기염을 토하고 있는 중이다.

기타노 다케시의 ‘아킬레스와 거북’ 역시 비교적 따뜻한 평가를 받았다. 이는 평단의 조롱을 받았던 ‘다케시즈’와 ‘감독만세!’에 이어 자칭 ‘예술과 오락에 관한 3부작’을 마무리한 자기반영적 작품이다. 예술가와 예술의 관계를 아킬레스와 거북의 경주라는 우화적 패러독스에 빗대고 있다. 인간의 노력보다 언제나 한 치 앞서 나가곤 하는 예술에 대한 탄식을 특유의 영화적 유머로 감싸면서, 감독은 ‘예술을 넘어서는 삶의 가치’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소나티네’같은 전성기 작품에는 못 미치지만, ‘아킬레스와 거북’은 재능있는 감독의 복귀를 알리는 작품으로는 환영할 만 했다.

또다른 경쟁작인 바벳 슈로더의 ‘음수’는 일본의 컬트 소설가 에도가와 람포의 원작을 영화화했다. 이른바 ‘일본적인 것’에 대한 온갖 상투적 표현이 가득한 스릴러로, 동양문화에 매혹된 서구감독들이 흔히 빠져들곤 하는 함정을 피하지 못했다. 터키 출신의 이탈리아 감독으로 이탈리아 내에서 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페르잔 오즈페텍의 신작 ‘퍼펙트 데이’는 여러 등장인물들의 하루를 치밀하게 관찰함으로써 현대사회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다. 하지만 의도에 걸맞지 않게 진부하고 통속적인 전개로 인해 시사회 당시 곳곳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가장 도발적이며 흥미로운 작품들은 비경쟁부문에서 나왔다. 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신작 ‘쉬린’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얼굴 클로즈업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디지털 영화로, 올 베니스의 가장 논쟁적 작품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화면 바깥의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모든 것을 관장하는 감독의 존재를 감춘 듯 드러내면서, 표현이 최소화된 형식을 통해 감정의 드라마를 만들어낸 걸작이다. 클레어 드니의 ‘럼주 35잔’은 일본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의 무대와 인물을 프랑스와 흑인 주인공들로 바꿔 놓았다. 범용(凡庸)한 일상 아래 켜켜이 쌓인 감정의 지층을 조심스레 들춰내는 이 작품은 창조적 번안의 진수를 보여준다.

한국영화는 올 베니스에 장·단편 모두 한 편도 초청되지 않았다. 반면 일본영화는 오시이 마모루의 ‘스카이 크롤러’ 까지 총3편이, 중국영화로는 지아장커의 촬영감독으로 널리 알려진 유 릭 와이의 신작 ‘플라스틱 시티’가 각각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아시아 영화만 두고 말하자면, 올해 베니스는 그 안이한 라인업으로 비판받을만하다. 공식부문에 초청된 4편의 중국영화 가운데 3편이, ‘스틸 라이프’로 2006년 베니스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지아 장커의 제작사 익스트림 픽처스의 작품이다. 유 릭 와이의 ‘플라스틱 시티’와 지아 장커 자신의 단편 ‘물위의 사랑’, 그리고 지아 장커가 프로듀서로 나선 에밀리 탕의 ‘퍼펙트 라이프’가 그것이다. 하지만 지아 장커의 단편을 제외하면 과연 베니스 같은 영화제에 걸맞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유 릭 와이의 작품은 스타일의 과시가 종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치달았고, 에밀리 탕의 영화는 지아 장커의 미학을 서툴고 조악하게 답습한 습작에 불과했다.

집행위원장으로 재신임돼 앞으로 4년 더 베니스 영화제를 이끌게 된 마르코 뮐러는 현대영화(modern cinema)라는 낡은 개념을 재고하게 만들만큼 새로운 영화들을 보여주겠다고 장담했다. 그 허언(虛言) 여부는 앞으로 남은 상영작을 통해 가늠될 것 같다. 올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은 독일 빔 벤더스 감독이 맡았다.

베니스=유운성<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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