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국제무대서 첫 입상한 화가 옌원량(顔文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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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세 때인 1984년 상하이 신캉화원(新康花園)에 있는 자택에서의 옌원량. 그의 마지막 사진이다. 김명호 제공

1919년 중국 최초의 미술전람회가 쑤저우(蘇州)에서 열렸다. 전국에 산재한 화가들의 작품 3000여 점을 한자리에 모은 엄청난 규모였다. 젊은 서양화가 옌원량(顔文樑)의 기획이었다. 관람객들은 중국화 외에 200여 점의 서양화를 볼 수 있었다. 쑤저우에 서양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원래 쑤저우는 중국미술사의 첫 장을 장식하는 남조(南朝)의 육탐미(陸探微)와 장승요(張僧繇)를 비롯해 명4대가(明四大家) 중 세 명을 배출한 중국미술의 발원지였다.
3년 후 옌원량은 쑤저우 변호사협회의 빈 방을 임대해 하계미술학교를 열었다. 학생들이 몰렸고, 1년 만에 정규 교육과정인 미술전과학교(蘇州美專)로 성장했다. 1927년 시 정부는 창랑정(滄浪亭) 안에 ‘쑤저우 미술관’을 건립하며 창랑정 관리인이었던 옌원량을 관장으로 초빙했다.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이 된 창랑정도 당시에는 방치된 상태였다. 쑤저우 미전을 미술관 부속으로 하자는 옌의 제의도 수락했다. 그해 가을 난징 중앙대학 회화과 교수 쉬베이훙(徐悲鴻)이 쑤저우 미전을 방문했다. 교장 옌원량을 만난 후 그의 교육관에 감동했고 작품을 보곤 감탄했다. 유화만을 그려온 옌에게 파리 유학을 권했다.
20세기 초반 파리에는 서양화를 배우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젊은 중국인 예술가가 많았다. 막상 와보니 서구 고전유화의 기교와 중국 전통화법 간의 차이가 워낙 컸다. 그림을 포기하고 주방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프랑스의 중국 요리가 맛보다 모양이 빼어난 것은 초창기 중국 요리사들이 주로 화가 지망생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오르세미술관과 루브르박물관 인근에 오래된 중국 음식점들이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다.
쉬베이훙이 옌원량에게 프랑스 유학을 권한 가장 큰 이유는 옌이 붓을 쥐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옌은 파리고등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그의 나이 35세, 고향의 기차역을 처음 그려본 지 20년 만이었다. 이듬해 파스텔화 두 점과 유화 한 폭을 파리 살롱전에 출품했다. 모두 입선했다. 중국의 주방 풍경을 그린 ‘주방(廚房)’이라는 작품은 금상을 받았다. 옌은 국제무대에서 입상한 최초의 중국화가였다.
몇 차례 개인전으로 수중에 돈이 들어오자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다니며 명화 원작들을 임모(臨摹)하고, 미술서적과 크고 작은 석고상들을 수집해 선편으로 쑤저우 미전에 보내기 시작했다. 중국인 주방장들 덕에 끼니를 해결하며 3년간 단벌로 버틴 결과 1만여 권의 미술서적과 500여 좌의 석고상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옌의 화풍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가 귀국하는 날 전교생이 역전에 나와 진을 치고 기다렸다. 1300여 년 전 서역에서 불경을 한 보따리 지고 돌아오는 현장법사(玄奬法師)를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쉬베이훙은 그를 ‘중국미술계의 현장’이라고 불렀다.
우시 미전(無錫美專) 학생 전원이 쑤저우 미전으로 전학을 오는 기상천외한 일이 발생했다. 교수들까지 따라오자 쑤저우 부호들이 교사 신축운동에 나섰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 최고의 정원 창랑정에 이오니아식 대형 건축물이 들어섰다. 중일전쟁 중 일본군은 쑤저우 미전을 사령부로 사용하며 석고상들을 전부 깨버렸다. 전쟁이 끝난 후 석고상을 찾아 헤매던 옌원량의 모습은 애처로웠다.
옌원량은 자신만의 독특한 미술교육관이 있었다. 순수미술과 실용미술을 모두 중요시했다. 중국화·서양화 외에 도안, 인쇄, 만화학과를 개설했고 해부학과 투시학은 필수과목이었다.
1983년 90세 회고전을 베이징에서 열었고 2년 후 제6회 전국미전에 ‘펑차오예보(楓橋夜泊)’를 출품해 명예상을 받았다. 94세에 마지막 그림을 그렸고 이듬해 노동절에 세상을 떠났다.
옌원량은 80년간 그림을 그렸다. 회화 사상 가장 오랜 세월 동안 그림을 그린 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예술가는 속(俗)돼서는 안 된다. 세속을 따라가지 않기가 정말 힘들었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그는 풍운이 교차하던 시대에 예술가의 본색을 끝까지 유지한 아름다운 영혼의 소지자였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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