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민주주의와 성공적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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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사람이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때로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 순간을 맞게 된다. 그때 어떤 현명한 결정과 대응을 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진로가 바뀐다.

1938년 9월 영국의 체임벌린 총리는 히틀러를 달래기 위해 체코의 주데텐 지역을 독일에 떼어주는 뮌헨협정을 체결하고 귀국했다. 그는 히틀러의 본심이 유럽을 지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최소한의 독일 민족의 생존영역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잘못 파악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영국 국민들도 전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체임벌린 총리를 평화의 사도라 부르며 열렬히 환영했다. 1939년 2월 당시의 여론조사는 74%의 국민이 체임벌린의 유화(宥和)정책을 통해 유럽의 평화가 가능하거나 영국이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상황에서 권력의 생리를 알고 히틀러의 유럽 정복의 야욕을 꿰뚫어본 사람이 처칠이었다. 그는 영국이 유화가 아니라 힘의 논리에 따라 강력하게 대응해야만 히틀러의 야심을 사전에 꺾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영국 국민들은 그를 전쟁광(戰爭狂)으로 내몰았다. 결국 처칠이 옳았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 주었다.

민주주의는 아마도 인류가 달성한 최대 업적 중 하나일 것이다.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군주가 마음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전횡도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38년 영국 외교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민주적 여론정치가 꼭 외교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국민 모두가 외교전문가는 아니고 처칠과 같은 전략적 사고와 역사적 혜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민주주의를 하면서도 결정적 상황에서 최선의 전략을 어떻게 선택하고 실천할 것인가가 모든 민주국가의 고민거리일 것이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첫째로 정치적 리더십이다. 전략적 사고와 비전을 가질 뿐만 아니라 이를 국민에게 전달하고 설득해내는 실천적 소통능력을 가진 지도자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예 중 하나가 1940년대 초반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었다. 제1차 대전을 겪은 미국인들 역시 전쟁은 절대로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루스벨트 대통령은 히틀러의 파시즘이 유럽을 지배하도록 방관할 수 없기에 민주주의의 보루인 미국의 참전은 불가피하다고 마음속으로 믿고 있었다.

1941년 초 전황이 다급해진 상황에서 영국의 처칠 총리가 전쟁물자 지원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민들이 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원치않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국민들에게 이웃집에 불이 났을 때 소방호스를 빌려주어야 하듯 물자를 잠시 빌려주어야 한다고 설득해 내면서 지원법안(Lend-Lease Act)을 통과시켰다. 결국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명분이 충분히 축적될 때까지 기다려 거국적 지지 속에 참전했고 세계를 파시즘의 지배로부터 막아냈다.

둘째, 탁월한 정치 지도자가 없는 경우에도 최악의 선택은 막아야 될 터인데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이 민주주의 제도의 확립이다. 감정적인 포퓰리즘의 영향을 최대한 배제하고, 냉정하고 치밀한 국익 계산을 통해 최선의 전략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민주주의 제도의 틀을 튼튼하게 다져놓아야 할 것이다. 만일 독일 통일 당시, 기민당 정부와 야당이 구체적 통일정책을 만들어내지 못할 만큼 민주적 제도장치가 취약했고, 그 결과 국민들이 정치인을 불신하고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찬반시위로 지샜다면 과연 독일 통일의 대업이 가능했을까?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언론의 역할이다. 민주주의의 여론수렴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은 지대하다. 언론이 국익 차원에서 다양한 전략적 선택들을 국민과의 토론을 통해 검증하고 걸러내는 역할을 하면서 중심을 잡아주어야 할 것이다. 만일 언론들이 국익이 아니라 정파적 입장에만 매몰되어 무조건 찬성이나 무조건 반대 논리로 일관한다면 국민은 혼란에 빠지고 정부는 무기력해지며 결단의 순간을 놓칠 것이다.

강대국 사이에 낀 한국은 전략적 실수를 할 여유가 조금도 없다. 중대한 결단을 신속하게 내려야 하는 외교적 도전들 앞에서 민주주의와 함께 성공적 외교를 하기 위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을까? 최근의 국내 상황들을 되돌아볼 때, 깊이 새겨볼 일이다.

윤영관 서울대·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