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문화체험>출판공동체-경희大 이석우교수 소나무 참여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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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문화의 시대가 도래했다.이제는 문화만 먹고도 살 수 있을듯이문화가 폭발하고 있다.그것도 가속도가 붙어서.
그러나 한가지 기이한 현상이 있다.문화는 속성상 다변.다양.
다색화될 것 같은데 오히려 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집어삼키는 문화흡수.통일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한사람이 청바지를 입으면 모두가 입기 시작하고,어떤 이가 「워부츠(War Boots)」를 신으면 거의가 앞다퉈 신는다.
심지어 개성.개별적이어야 할 립스틱 색깔마저도 통일돼 가고 있다.붉은색을 금색.은색으로,다시 흰색으로 바르더니 이제 검은색 립스틱이 검은 옷과 함께 등장했다.모르긴 하되 곧 초록색이등장할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런 색깔의 변화가 함께 나타났다 꺼지듯이 동시에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문화의 주체는 없고 추종적으로 따라가는 수요자만 있을 뿐이라는 얘기가 된다.그래서 때로는 식상하고 재미가 없다. 이런 세상에 책공동체 「소나무」에 참여했던 일은 신선한 체험이었다.더욱 좋은 것은 어떤 바람과 기대를 지속적으로 갖게 됐다는 사실이다.
책을 출판사 직원 몇사람의 손으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이 공동체적으로 펴내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그것도 한권의 책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여러 책을 함께 만들자는 것이다.이즈음 사람과 사람 사이가 모래알처럼 흐트러지고,출판만 해도 전자편집이라 하여 개별화가 가속되는 추세와는 반대되는 발상이라 하겠다.
개인출판사 소나무가 공동체로 재탄생한 날은 지난 3월30일.
6개월의 준비 끝에 환경과 자연철학연구소,동의과학연구소,한글방이 하나로 뭉치고 일반인에게도 문을 개방했다.
1백여명의 발기인으로 시작한 식구도 현재 1백50여명으로 불었고 직장인은 물론 주부.교수.한의사.사업가.대학생 등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다.
나는 우선 조합이란 말,공동체란 말이 좋다.그것은 조화.협력.어우러짐과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마치 물방울들이 모여 강을 이루는듯한 어떤 힘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책을 사보는 소비자의 처지에서 생산자의 입장이 된다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책을 볼 때마다 심산유곡에서 큰 톱으로 베어져 생명을 잃은 수많은 나무들을 생각케 된다.
나무의 생명을 희생시키는만큼 좋은 책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소나무공동체 조합원은 모두 출판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한사람이 어떤 책의 출판을 원한다면 기획위원회의 동의를 얻고 다수 조합원이 찬성하면 된다.
때로 잘 되면 인센티브까지 받는다.조합원이 될 수 있는 기본출자금은 계좌당 1만원으로 조합의 목적에 동의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나는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그것만으로 어깨가 으쓱해진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내가 언제 내 입김으로 꽃 한송이 피워낸적이 있으며 언제 내 눈물로 지상에 이슬 한방울 내리게 한적이있었던가.실제 소나무에서 출판된 책표지 안에는 「조합공동체 소나무의 책은 조합원이 함께 만들고 있습니다」는 선언 아래 1백50여명의 조합원 이름이 깨알처럼 찍혀 있다.
소나무는 어려운 시절 많은 진보적 책을 선구적으로 출판했다.
제주 4.3사태를 입에 올리기도 어려웠던 때 『4.3 자료집』을 3권이나 냈었다.지금도 양식있는 책을 내려고 상업출판의 폭우 속에 외로운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어느 지하철역에서 본 일이지만 홀로 외치면 아무리 바른 소리라도 사람들이 냉소하거나 바라만 보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함께 외치면,더구나 책으로 만들어 말하면 사람들은 훨씬 귀기울인다.아무리 시대가 상업화에 혼줄이 빠져 나갔다 하더라도 바른 책을 내면 분명 읽는 독자는 있다.무엇보다 휘청거리는 문화를 구제하는 확실한 대안은 역시 책인걸 어 떻게 하랴.
화병 속의 꽃은 아무리 찬란해도 채 1주일이 못간다.그런데 출판조합은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울 것 같아 조합원이 됐다.아직은 걸음마 단계라는 것을 안다.바로 그 때문에 참여하는 기쁨이 더하다.
당장의 효과는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언젠가 그곳에 다시 돌아가면 우리의 정성이 고스란히 쌓여 자라고 있으리라는 믿음.기성품보다 「Do it yourself」(스스로 만들어가는 것)가더 즐겁고,세상은 우리가 만들어 가는데 따라 그 만큼 달라질 수 있다.
소나무가 주축이 된 사회문화학교의 토론에 참여하고,주말에는 치악산 소래울터에서 시원한 개울과 화사한 꽃들과 대화하며 우리농산물도 함께 나눠먹는 일이 또다른 삶의 재미가 아니겠는가.
이석우 서양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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