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축구 유망주 아프간서 戰死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5면

▶ 틸만의 팬들이 23일 미국 애리조나주 템피에 있는 카디널스 훈련캠프에 마련된 틸만의 추도실에서 방명록에 서명하고 있다. [템피 AP=연합]

미국 애리조나 카디널스팀의 팻 틸만(27)은 잘 나가던 미식축구 선수였다. 애리조나 주립대를 졸업하고 1998년 스카우트된 틸만은 한 시즌에 224개라는 팀 내 최다 태클 기록을 세우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는 2001년에는 세인트루이스 램스 팀에서 5년간 계약조건으로 900만달러를 제안받기도 했다.

하지만 2001년의 9.11 테러는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할아버지 때부터 군인 가족으로 자라난 그의 애국심이 발동한 것이다. 카디널스에서 3년 계약으로 360만달러의 연봉을 받던 그는 2002년 5월 동생 케빈과 함께 군에 입대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던 여자친구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진주만에 있었고 우리 가족 여러 명이 전쟁에서 싸웠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있다"는 게 이유였다. 수백만달러를 받던 촉망받던 미식축구 선수가 졸지에 2만달러도 못 받는 일반 사병이 된 것이다.

그는 동생과 함께 가장 위험한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 중 하나인 75특공연대에 배치됐다. 틸만이 군에서 어떤 활약상을 보였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언론이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틸만이나 그 가족은 "다른 사병들과 다르게 대우받을 이유가 없다"면서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군 당국은 틸만이 위험한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훈장을 받았다고 밝혔다.

틸만은 이라크에서도 작전을 수행했다. 2003년 이라크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 틸만의 매니저는 "미식축구 팀 여러 곳에서 제안이 들어오는데 그만 제대하는 게 어떠냐"고 은근히 권고했다. 이에 대해 틸만은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제대는 가능하지만 3년간 복무하기로 했으니 그 약속을 지키겠다"며 거부했다고 워싱턴 포스트는 전했다.

매니저는 이때 이후 그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미군 당국은 지난 23일 틸만이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 남쪽으로 150km쯤 떨어진 산악지점에서 알카에다 잔존세력과 교전을 벌이다 전사했다고 발표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아직도 1만명의 미군이 알카에다 추적전을 벌이고 있고, 틸만은 70번째 미군 희생자라고 한다.

틸만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애리조나와 틸만의 고향 마을인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는 그를 추모하는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고 CNN 등 미국 언론은 보도했다.

하지만 틸만의 가족은 "다른 병사들도 많이 죽었고 다른 대우를 받고 싶지 않다"면서 언론과의 인터뷰를 삼가고 있다고 미 언론은 전했다. 징병 상황이던 베트남전 이후 유명 프로 운동선수가 전투 중 사망한 것은 처음이다.

월남전 참전용사인 애리조나 상원의원 존 매케인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으며 큰 손실"이라고 애도했다.

워싱턴=김종혁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