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 시시각각

인터넷 전선 이상 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장루이 마르탱은 호언한다. “나는 인터넷을 이용해 생각만으로 세계적 사건이 일어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전직 은행원이다. 왼쪽 귀로 듣고 오른쪽 눈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눈 깜박임 하나로 인터넷 바다를 헤엄쳐 수많은 전문지식을 축적한다. 결국엔 자신을 치료하던 의사를 죽음으로 몰고 환자들을 조종해 병원을 자신이 지배하는 성으로 만든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뇌』 이야기다. 하지만 소설 속 허구로만 치부하기엔 꺼림칙하게 남는 구석이 있다. 소설보다 드라마틱한 게 현실인 까닭이다. 실제 이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들을 현실에서 접하지 않느냔 말이다.

 양은 냄비처럼 식었지만 광우병 파동이 그랬다. 실존하지 않는 병에 온 국민이 공포에 떨었다. 발단은 TV였지만 인터넷에서 수백 수천 배 증폭됐다. 말이란 게 입에서 입으로 옮겨질 때마다 살이 붙게 마련이지만 인터넷에는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증오 유포장치가 있었다. 현실에 불만이 가득한 대학강사나 공무원이 합세해 날조된 증오를 퍼뜨렸다. 막연한 위험이 구체적 현실로 탈바꿈했고 이성(理性)의 목에는 매국(賣國)이라는 칼이 씌워졌다.

총성은 없었지만 내전(內戰)과 다름없었다. 실제 전쟁과 마찬가지로 최대 피해자는 민간인들이었다. 가뜩이나 나쁜 경기에 유력신문에 광고 내지 말라는 협박전화에 정상영업을 못한 중소규모 여행사·건설회사들이 도산 지경에 이르렀다. 촛불시위 주동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낸 상인들 역시 눈 부라린 협박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그 뒤에는 언제나 증오를 확대재생산하는 인터넷이 있었다. 인터넷에는 그날그날 숙제처럼 공략해야 할 업체와 상인들의 명단이 돌아다녔다. 가당치 않기는 하지만 “한국의 인터넷은 ‘정보의 창’이 아니라 ‘독약’으로 의미가 변질되고 있다”는 중국 환구시보(環球時報)의 비아냥도 그래서 나왔다.

인터넷 증오는 쉽게 국경을 넘는다.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이 나올 때마다 분쟁의 최전선은 외교무대가 아닌 인터넷이다. 국제관계를 고려해 감정대응을 자제한 외교수사 대신 분노와 앙심 가득한 독설이 먼저 일 합을 겨룬다. 이런 다툼은 본질은 이내 사라지고 “어따 대고 반말이냐”는 식의 드잡이로 변질되게 마련이다. 앙금도 오래 남는다. 한·일보다 한·중 관계에서 인터넷 증오가 더 격렬한 것도 쓰촨(四川) 대지진 때 “잘됐다”는 일부 한국 네티즌의 댓글이 여과 없이 전달된 탓이란 분석이 있다. 한국의 올림픽 야구 우승에 격려와 빈정이 섞인 일본 네티즌 반응과 달리 중국이 야유 일색이었던 것도 그런 반한(反韓)감정 말고 달리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 네티즌들이 유독 심한 건 아니다. 국가와 인종·종교가 결합된 증오는 끔찍할 정도다.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 사이에는 그야말로 전쟁이라 불릴 만한 해킹과 사이버 테러가 판을 친다. 미국에서는 무슬림들을 땅에 묻는 ‘자살폭탄’, 멕시코 불법이민자들을 사살하는 ‘국경수비대’ 같은 네티즌 제작 게임들까지 나왔다.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가 “인터넷이 전쟁터가 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을 정도다.

 문제는 이런 인터넷 전쟁이 극소수 과격분자나 철없는 학생들에 의해 점화돼 확산된다는 것이다. 기술이 발전하고 공유 사이트들이 늘어나면서 디지털 콘텐트를 통한 증오의 유포가 갈수록 수월해지고 있어 더욱 문제다. 소설은 마르탱을 인터넷과 격리시키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현실에선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하루빨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막말을 하는 네티즌을 가상 구금하는 사이버 법정을 운영해 효과를 보고 있는 해외 사이트들(본지 8월 21일자 23면)을 참고할 만하겠다. 그런 규범을 보완해 국제기준으로 확대해야 한다. 남이 안 해도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해야 한다. 안팎으로 여러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우리여서 하는 말이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