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친구 살리기 肝 나눈 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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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암으로 사경을 헤매는 친구에게 자신의 간 절반을 이식해 주기 위해 병원에 입원한 한상환씨(左)가 친구 이학근씨와 함께 활짝 웃고 있다. [조용철 기자]

"친구보다 제수씨가 고맙죠, 기증을 허락해 주셨으니."

"야, 형수라니까! 주민등록증 까볼래?"

23일 오후 서울 강남성모병원. 중년 사내들의 걸쭉한 대화에 봄날 오후의 나른함이 창밖으로 날아가버렸다.

한상환씨와 이학근씨. 두 사람은 1958년생 개띠 동갑내기 친구다.

85년부터 청량리1동에서 앞뒷집에 살며 가까워졌다. 전기 배선기술자인 韓씨의 가게와 에어컨.냉장고 수리 기술자인 李씨 가게도 붙어 있다. 재개발된 뒤에는 아파트 이웃 동에 산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으로 모든 시름을 풀어버리는 친구 사이에 훼방꾼이 나타난 것은 95년.

李씨가 간염에 걸린 것이다. "좋다는 약은 다 찾아 먹어보았지만 차도가 없었어요. 2000년에는 간경화, 지난 2월엔 간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방법은 간이식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직검사 결과 부모.형제는 물론 처와 처가 쪽에서도 거부반응이 나왔다.

애태우고 있던 李씨는 어느날 韓씨와 통화하다 뜻밖의 말을 들었다.

"야, 내가 너 살려줄게. 내 간이 너에게 맞으면 말이야."

평소 동대문구 봉사단체 '사랑마을' 회원으로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을 펼쳐온 그다.

"제 한 몸이 건강해 친구를 도울 수 있다는 게 다행이죠.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요. 친구를 살릴 수만 있다면."

신기하게도 두 사람의 간 조직은 궁합이 맞았다. 부인 배미자(46)씨는 "어쨌든 남이 아니냐"며 처음에는 반대했다. 하지만 "거꾸로 내가 그런 경우라고 생각해 봐라"며 고집을 피우는 남편에게 손을 들었다. 결국 "(뭐 바라고 하는 게 아니냐는) 남의 소리에 신경쓰지 말고 잘 마치라"고 격려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수술 준비에 나선 이들은 복병을 만났다. 장기 이식은 해당 병원장과 국립장기이식센터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조사를 나온 직원이 '혹시 장기 밀매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품었던 것. 李씨의 결혼식 사진과 비디오 등으로 가까스로 '친구 증명'에 성공했다.

韓씨는 "친구라는데도 믿지 않더군요.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고 안타까워했다.

지난 22일 서울 강남성모병원에 나란히 입원한 이들은 27일 수술을 앞두고 있다.

'간 큰 이웃 친구' 덕분에 새 삶을 얻게 된 李씨의 얼굴엔 감사함과 미안함이 교차했다.

"친구가 간을 빼주었는데 저는 뭘 못 주겠습니까. 수술 때문에 일을 못 나가게 돼 더 미안할 따름이죠."

"이제 삼겹살에 소주 먹는 낙도 없어졌네요. 앞으로는 이 친구와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렵니다. 봉사란 게 뭘 많이 가져서 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세상에는 제 몸으로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韓씨는 손등에 링거 호스가 거치적거렸지만 친구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고 보니 마치 오래된 형제처럼 흰 머리에 구릿빛 얼굴이 서로 닮아보였다. 오래 사귀면 몸도 마음도 닮게 되나 보다.

정형모 기자<hyung@joongang.co.kr>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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