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마오 후계자’ 화궈펑 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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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궈펑 전 중국 공산당 주석이 지난해 10월 15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제17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 개막식에 참석했을 때의 모습. [베이징 AP=연합뉴스]

마오쩌둥(毛澤東)이 직접 지명한 후계자였던 화궈펑(華國鋒)이 20일 베이징(北京)에서 지병으로 숨졌다고 중국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통신은 “당과 국가의 중요 직무를 담당한 영도자였던 화궈펑 동지가 20일 낮 12시50분(현지시간) 87세로 타계했다”고 전했다.

중국 정부가 운영하는 관영 언론사인 이 통신은 ‘우수한 당원이자 충성스러운 공산주의전사,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 혁명가’로 화궈펑을 지칭했다. 1921년 산시(山西)성에서 태어난 화는 마오의 후계자로 마오 사후 총리에서 일약 공산당 주석(당시 최고 실권자)과 군사위원회 주석을 겸직했지만 개혁파에 의해 밀려난 비운의 정치가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오랜 투병 끝에 방광암으로 사망하자 마오는 그해 2월 부총리로 일하던 화를 총리 대행으로 발탁했다. 그에 앞서 마오는 자신이 후계자로 키웠던 린뱌오(林彪) 부주석이 반혁명 음모를 꾸미다 비행기 사고로 추락사한 이듬해인 72년 후난(湖南)성 당 제1서기로 있던 화를 공안부장으로 불러올렸다. 화는 73년 중공 10기 당 중앙위원 겸 정치국원으로 발탁됐고, 75년에는 국무원 부총리로 승진해 권력의 핵심으로 초고속 진입했다.

마오가 숨지기 전 화를 불러놓고 “자네가 일을 맡으면 내 마음이 놓인다”고 말할 정도로 신임한 후계자였지만 마오가 숨진 다음달인 76년 10월 군부 내 개혁파와 손잡고 마오의 부인 장칭(江靑)을 비롯한 4인방(四人幇) 숙청을 전격 승인했다. 그의 결단은 문화대혁명(1966~76년)을 종료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의 물꼬를 트는 데 길을 열어줬다.

화는 78년 총리에 정식으로 선출되면서 최고지도자 반열에 올랐지만 그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4인방을 숙청한 이후에도 “마오 주석이 내린 결정을 굳게 지키고, 마오 주석의 지시를 시종일관 받들어야 한다”는 이른바 범시론(凡是論)에 집착해 시대 흐름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한 것이 큰 실수였다. 개혁파는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며 유명한 ‘진리논쟁’을 일으켜 화를 실각시켰다.

덩이 주도한 개혁파에 밀려 화는 결국 80년 9월 총리직을 내놓았고, 81년 6월에는 당 주석과 군사위 주석에서도 물러났다. 오랜 칩거 생활을 하던 화는 92년 1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대표로도 선출됐고 2002년 11월까지 당 중앙위원 직위를 유지했지만 대외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칩거해 왔다.

덩샤오핑이 밀어붙인 개혁·개방 30년의 성과를 전 세계에 과시하는 무대가 된 베이징 올림픽 폐막식을 나흘 앞두고 화는 끝내 숨을 거뒀다.

베이징=장세정 특파원

[중국 인물정보] 화궈펑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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