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 최민식 지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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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기억의 덫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사진작가 최민식이 40여년간 걸어온 작품세계를 한눈에 보여주는 사진산문집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은 우리의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을 비춰주는 거울 구실을 하고 있다.사진을 종 이거울에 비유한 저자의 생각은 우리에게 긴 설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표지에 나와 있는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그것이 현재 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까지 비춰주는 4차원적 거울임을 깨달았다.거리의 모퉁이에서 「호옥」 숨 한번 쉬고 국숫발을 빨아올리는 어린 여자애의 모습,난 그것이 바로 가난했던 내 누 이의 초상임을 눈치챘던 것이다.
책갈피를 넘길수록 나는 마치 내 가족사진첩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고된 노동의 틈새에 짬을 내 길거리에서 누이의 등 위에 업힌 아이에게 선 채로 쭈그렁 젖꼭지를 물리는 여인은 누구던가.집도,돈도,그리고 당장 먹 을 것도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골목 어귀에 하릴없이 쪼그리고 앉은 무능한가장의 이름을 난 안다.이처럼 한 인간의 고통스런 기억의 뿌리를 우악스레 잡아채 흔드는 최민식의 사진과 글의 힘은 어디서 우러나오는 것일까.그것은 무엇보다 가 식없음에서 찾아질 것 같다.그는 결코 연출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작가는 이런 사진철학이 그가 지금껏 영원한 주제로 삼아온 「인간」의 진실이란 결코꾸며질 수 없다는 투철한 신념에서 비롯됐다고 밝히고 있어 인상적이다. 물론 사진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찍기 때문에 거짓이 있을 수 없다는 우리의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때로 사진이 저지르는 거짓은 교활하기 짝이 없다.
최민식의 사진은 이 함정을 어떻게 비켜가는가.
『내 사진은 밑바닥 삶에 동정이나 호기심을 보내는 게 아니라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고발이다.』 이런 타협없는분노의 시선이야말로 거짓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패였다고 고백하는 말로 들린다.사실 자신이 속한 사회나 세상에 아무런 분노를 지니지 않은 자가 어떻게 인간을 사랑하고 삶의 존엄성을 떠들 수 있을 것인가.이런 점에서 휴머니즘적 리얼리즘을 추구하는최민식의 사진은 더욱 빛난다.
(소설가) 김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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