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신뢰’ 두 날개 달아야 글로벌 기업 늘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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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 22면

독일 운테르벨렌본에 있는 아르셀로 미탈 공장. 전기로 회사에서 출발한 인도계 아르셀로 미탈은 거침없는 인수합병을 통해 세계 1위 철강 회사로 성장했다.

지난달 인도 굴지의 대기업 인수합병(M&A)팀이 한국을 다녀갔다. 부도난 화섬 업체를 인수하기 위한 기초조사 차원이었다. 이들은 “임직원 500~600명 규모의 회사를 6000만 달러 정도에 사고 싶다”는 구체적인 조건도 제시했다.

국가경쟁력 첨병은 초대형 기업

한국에선 사양산업으로 버림받고 있는 화섬 회사를 인도 기업이 인수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KOTRA 한정곤 뭄바이 무역관장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로 관세 철폐 등의 혜택을 업고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싶은 것”이라며 “인도산보다 ‘메이드 인 코리아’로 수출하면 시장 공략이 수월할 것이란 계산도 깔려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인도 대기업들은 중장기적으로 개성공단 등 북한에 진출하겠다는 의사도 밝히고 있다”고 말했다. ‘2류 기업’이라고 알고 있었던 인도 기업의 글로벌 경영 스케일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인도 기업들의 글로벌 M&A 안목은 이미 세계적 수준에 올라 있었다. 뭄바이에서 만난 인도 중위권 대기업 에사르. 이 회사에서 M&A를 전담하고 있다는 수디프 룽타 사장은 “케냐의 유력 이동통신 회사 지분을 확보했다”고 자랑했다. 룽타 사장은 “아프리카 대륙은 하루 평균 5만 명이 신규로 이동통신에 가입하고 있는 황금시장”이라며 “그런데 이동전화 보급률은 20~30%에 불과해 잠재력이 무한대”라고 강조했다. 마치 ‘아프리카는 인도의 앞마당’이라는 말투다.

두세 달 한 번꼴로 M&A
비즈니스 스케일로 치자면 세계 1위 철강회사 아르셀로 미탈 만한 회사가 없다. 이 회사 락시미 미탈 회장은 26세의 나이에 인도네시아에서 소규모 전기로 업체를 경영하다 M&A로 ‘몸집 불리기’에 나섰다. 특히 2006년 아르셀로를 성공적으로 인수하면서 연 1억1600만t의 철강을 생산해 2위 신일본제철(3570만t)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락시미 미탈 회장은 “성공을 거머쥐려면 속도가 중요한데 우리는 그 방법으로 M&A를 선택했다”고 큰소리친다.

중국·인도·중동 등 신흥시장 국가의 서방 기업 ‘사냥’이 뉴스가 된 것도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영국의 시장조사 업체인 딜로직에 따르면 신흥시장 기업의 외국 기업 인수 규모는 올 상반기 중 1800억 달러에 달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0%나 늘어났다. 지난달 발표된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에 한국 기업은 15개가 들어 있다. 중국(29개)이 이미 우리를 추월했고 인도 기업(7개) 역시 속속 이름을 올리고 있다.

M&A를 통한 기업 성장 전략의 원조는 누가 뭐래도 미국이다. 미국 실리콘 밸리에 있는 네트워크 장비 업체 시스코. 이 회사의 역사는 M&A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4년 설립된 시스코는 지금까지 110여 차례의 M&A를 거듭해 매출 400억 달러 회사로 성장했다. 두세 달에 한 번꼴로 M&A 서류에 사인한 셈이다.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 만난 힐튼 로만스키 시스코 부사장은 “우리가 보유한 기술·마케팅 능력을 보강해 시장을 확장할 수 있거나 아예 새로운 시장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M&A를 활용한다”고 대답했다. 구글·야후·마이크로소프트(MS)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도 지속적인 M&A를 통해 시장 지배력을 확대하고 있다.

국가경쟁력의 최첨병은 초대형 기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초대형 기업들이 국부의 원천인 샘 역할을 하고 그 물이 중소기업과 서비스 내수업체 등으로 고루 흘러 드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이휘성 한국IBM 사장은 “한국 경제가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수의 초대형 기업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한국은 이제 ‘재빠른 모방자(Fast Follower)’ 전략에서 벗어나 해외 투자와 M&A 등을 통해 글로벌 리더십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기업들이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의 산업 생태계가 정착하는 것도 중요하다. 최근 대·중소기업 관계가 전통적인 갑을(甲乙) 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자금 지원, 공동 연구개발 등 다양한 구상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중소기업을 대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한 ‘수단’쯤으로 인식하는 풍토가 여전한 게 사실이다.

신영철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글로벌 경쟁은 개별 기업 간의 경쟁이 아니라 그 기업이 보유한 네트워크 간의 경쟁이다. 따라서 대·중소기업 간 소통과 상생이 더욱 절실하다”고 말했다. 단순하청 관계가 아니라 기술·정보·자본을 공유하는 신뢰의 모델이 뿌리내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존경받는 기업, 생존력도 강해
한국 기업이 안고 있는 또 다른 숙제는 기업시민으로서 신뢰를 쌓는 일이다. 아무리 좋은 성과를 낸 기업이라도 기업윤리를 저버린다면 생존이 위협받는 시대다.
인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통하는 타타그룹은 회사 정관에 사회적 책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룹 창업자인 잠세트지 누세르완지 타타의 유지를 따른 것이다.

타타 계열사로 소프트웨어 아웃소싱 세계 1위 기업인 타타컨설턴시의 프라딥타 바그치 부사장은 “타타의 사훈은 ‘선한 생각, 선한 말, 선한 행동’이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매년 1억 달러(순이익의 3분의 1)가 넘는 돈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타타는 자그마치 97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지만 반기업 정서 문제로 고민해 본 적이 없다.

빌 게이츠 전 MS 회장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을 통해 경제발전의 혜택이 공동체 구성원에게 골고루 돌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이른바 ‘창조적 자본주의’를 주창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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