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심의통과한 영화"유리" 시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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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베일에 가려져있던 영화 『유리』가 지난달 25일 처음으로 시사회를 가졌다.『유리』는 2월22일 공륜에 심의를 신청했으나 불교의 이미지를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그동안 심의가 지연되다25일 세곳이 가위질 당한채 심의를 통과했다.
심의 과정에서 논란이 많았는데다 무삭제 필름을 볼 수 있는 기회여서 그런지 시사회는 대성황을 이뤘다.
그러나 불교의 이미지를 해칠 우려가 있다는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특정종교의 이미지 훼손 여부를 둘러싸고 일었던 그간의 논란은 이날 시사회를 계기로 이 영화가 과연 무엇을 성취했는가라는 논의로 변했다.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각색한 『유리』에 관심이 쏠린이유는 인간 사유의 극한인 생명과 죽음의 본질에 관한 방대한 관념체계를 어떻게 영화로 풀어낼 것인가 궁금했기 때문.
양윤호(30)감독이 채택한 방식은 알레고리적 수법이다.영화의표면적인 스토리는 구도승 유리(박신양)가 스님들이 귀양가서 구도하는 「유리」지역과 현실세계인 「읍내」지역을 오가며 행하는 40일간의 극단적인 구도과정을 따라간다.
그 과정은 비구승 누이(이은정)와의 야수같은 정사나 돌로 스님의 머리를 부수는 잔혹한 살인과 같은 극단적인 행위로 이어진다.대개의 서사 전개과정에서 이런 행동은 극적 전환을 가져오는계기로 앞뒤의 맥락이 있지만 이 영화에선 아무런 설명도 없다.
그래서 현실의 통념으로 봤을때 유리의 행위는 아무런 개연성도없는 것처럼 보인다.유리의 행위를 이해하려면 그의 머리속에서 진전되고 있는 관념세계를 나란히 쫓아 가야 한다.
감독은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동과 소품 하나하나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양감독에 따르면 「유리」지역은 정신적인 세계,「읍내」는 물질중심의 사회로 구분되고 유리가 죽어가는 누이와 정사를 하면서 혀의 일부를 떼어 입속에 넣어주는 장면은 탄생과 죽음의 두 꼭지점을 이음으로써 생명의 본질에 도달한 유리의 사 상을 함축한다. 이 영화는 장면장면이 이같은 상징들로 가득하고 이를 보강하는 유리의 관념적 내레이션이 단속적으로 이어진다.
파격적인 카메라 앵글과 개펄처럼 이물감을 주는 질감으로 이 방대한 관념을 영상에 담아보려한 실험은 큰 의의가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한가지 아쉬움을 남긴다.감독의 관점이 동일한 한 층위에 머무르는데 실패하는 바람에 상징들이 파편처럼 흩어진다는 것이다.
유리는 구도행위 자체까지도 생명의 본질에 반하는 일종의 도그마적 성격을 갖고 있는게 아닌가라는 고민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그래서 살인.정사와 같은 행위도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읽힐 수 있다.감독은 유리지역 장면에서 그의 행위를 이 같은 「종교적 층위」에서 상징화하고 있다.
그러나 유리지역을 정신세계로, 읍내를 물질세계로 상징화하면서감독의 관점은 사회도덕적 층위로 이동해버린다.
이 때문에 초반부에서 가닥을 잡아가던 상징의 일관성이 후반부에서 한꺼번에 무너져내린다.영상언어의 문체도 우화시에서 소설로돌변해버린다.재즈와 같은 불협화음을 의도하지 않았다면 잡음많은교향악 같은 인상이다.
남재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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