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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환의 당당한 이류] 탤런트 김용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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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에서 냉정하고 강인한 어머니 역을 도맡아온 탤런트 김용림. 40년 경력의 고참 연기자지만 녹화시간에는 가장 먼저 대기하는 부지런함으로 유명하다. [신인섭 기자]

아침 6시25분 서울에서 FM 101.9 MHz(BBS)로 주파수를 맞추면 귀에 익은 중년 여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프로그램 제목은 '신행 365일'. 부처님 말씀 한 구절을 통해 생활 속의 진리를 터득하는 시간이다. 불교방송 개국(1990년) 이후 줄곧 이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그녀는 연기자 김용림이다. 녹음할 때 한번 예습하고 방송될 때 한번 복습하면서 오래 전부터 명상을 즐기는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왔다.

마음만 먹으면 평일 내내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다. SBS 일일극 '흥부네 박터졌네'의 촬영을 마치고 곧바로 MBC 새 일일드라마에 출연하기 때문이다. '인어아가씨'를 쓴 임성한 작가의 작품인데 특이한 것은 실제 남편인 남일우씨가 극중 남편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흑백TV 시절 KBS 사극 '세종대왕'에 함께 출연한 뒤 30여년 만의 일이다. 당시 남편은 세종 역을, 그녀는 어머니인 원경왕후 역을 했다.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모자지간으로 나오니 남편이 아내에게 "어마마마" 하면 스태프들이 웃느라고 NG가 많이 났다. 그 후로 한 번도 같은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았다.

30여년 전에도 어머니였던 그녀가 지금쯤은 할머니역을 맡음 직한데 극중에서 여전히 씩씩한 어머니다. 오히려 더 젊은 어머니역을 맡고 있다. 비결은 무얼까. 그 긴 시간 드라마 안팎으로 한결같이 씩씩했지만 결코 씩씩거리거나 쓱쓱 넘어가지 않았던 덕분이다.

1940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한의사였던 아버지는 한국전쟁 중에 돌아가셨다. 그림을 잘 그려 중학교 2학년 때는 문교부장관상을 타기도 했다.

인생의 전기는 곧잘 만남에서 비롯된다. 당시 연극반을 지도하던 강춘희 선생님의 눈에 띈 게 길고 긴 배우의 길의 시작이었다. 맡겨진 화랑 역할을 제대로 해내자 가히 인기폭발이었다. 남을 즐겁게 한다는 일에 자신도 즐거웠다. 졸업한 뒤 KBS 성우 4기로 들어간다. 당시 배화여고 연극반 친구 3명이 모두 합격했다. 줄곧 주인공 역만 도맡던 그녀는 KBS 성우 3기인 남편과 5년 열애 끝에 결혼한다.

목소리 연기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겨울사자들'로 동아연극상 여우주연상을 탈 정도로 무대에도 열심히 섰다. 동양방송(TBC)이 개국하면서 성우들 대부분이 TV연기자가 된다. 이직(離職)이 아니라 겸직이었다. '눈이 나리는데'에서 여자사무원역으로 탤런트 생활에 발을 들였다. 성우나 연극배우로는 늘 주인공이었지만 TV에선 단역이었다. 선우용녀의 데뷔작인 사극 '상궁나인'에서 모처럼 큰 역을 맡아 열연했다. 왕(이순재 역)을 사이에 두고 각축하는 중전 역이 시청자에게나 연출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 후 숱한 사극에서 한번도 행랑어멈 역을 해보지 못했다. 늘 보료 위에 앉아서 근엄한 표정으로 지시하는 역이었다.

드라마의 어머니상은 크게 보아 두 가지다. 인자하고 눈물 많은 어머니, 냉정하고 강인한 어머니. 그녀가 맡은 역은 늘 후자였다. 특히 김수현 드라마 '사랑과 야망' '후회합니다' 등에서 보여준 현실적인 어머니역들은 그녀를 부동의 연기파 배우로 자리 매겼다. 제1회 MBC 방송대상을 안겨준 '억새풀'은 어머니 연기의 결정판이었다.

엄격하고 단호한 이미지였던 그녀가 얼굴의 근육을 푼 건 시트콤 '남자셋 여자셋'에서였다. 한 마디로 망가지는 역이었다. 처음엔 완강히 거부했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출자의 집요한 설득에 그만 넘어갔다. 처음 5주째까지는 겉돌다가 6주째 되면서 드디어 '확 벗기로' 결심한다. 그때부터 신동엽 이의정이랑 잘 놀았다. 권위를 벗어던지니 자유가 찾아왔다.

지금도 펄펄 들끓고 있는 그녀가 이번 어버이날에 진짜로 며느리를 본다. 극중에서 수도 없이 혼사를 치렀지만 이번엔 현실이다. "마음이 허하죠." 그러나 이내 평정심으로 돌아온다. 알려져 있다시피 며느리(김지영)와 아들(남성진)은 '전원일기'의 복길이와 영남이다. "고약한 시어머니는 안 되시겠죠?" 돌아오는 대답이 부드럽다. "고약한 것과 분명한 것은 다르죠."

그녀는 녹화 시간에 제일 먼저 분장을 끝내고 세트장에 앉아있기로 유명하다. "당돌한 후배는 많아도 당당한 후배는 만나기 힘들다." 40년 넘게 연기자로 살아온 그녀의 세상걱정이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chjoo@ewha.ac.kr>
사진=신인섭 기자 <shin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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