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엄뿔’이 인간 장미희도 살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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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희다! 장미희!” “어쩜 인형 같네, 인형 같아.”

50대 아주머니 몇몇이 수군댔다. 20대 젊은이 두엇도 힐끔거린다. “야, 진짜 50대래? 아니지? 30대 중반쯤 돼 보이는데?”

6일 오후 10시30분 마포 ‘최대포집’ 앞은 구경꾼으로 북적였다. 배우 장미희가 가게 안에서 이동통신 서비스 CF를 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CF에선 ‘팀장님’으로 나오지만 우아하게 아는 척하다 망신도 당하는 ‘엄뿔’ 이미지 그대로다. 이민기·유해진·이문식 등과 함께 출연하지만 주인공은 역시 홍일점인 ‘장 선생님’이다. 얼마 전에는 주스 CF도 찍었다. 4년 만이었다. CF 출연료도 많이 올랐다. 주름 하나 없이 세월을 잊은 듯한 모습에 보톡스 광고 섭외까지 들어왔지만 거절했다는 후문이다. 각종 홍보대사 요청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명품 브랜드 협찬도 몰린다. 8일 드라마 촬영장에서 입은 초록색 드레스도 랑방에서 협찬한 것이다. 한 관계자는 “입고 싶은 옷, 하고 싶은 액세서리 다 골라서 할 수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드라마에 출연할 때는 의외로 의상 협찬 받기가 쉽지 않다. 화보 촬영과 달리 연기는 몸동작이 많아 옷이 쉽게 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라 왕과 보테가 베네타 등 세계적 브랜드가, 그것도 나이 쉰 살의 여배우에게 앞다퉈 협찬하고 있는 것이다. 5000만원짜리 보석 세트, 시가 3억원의 반지가 ‘장미희 효과’를 등에 업고 팔려나가고 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가 1년 전 ‘학력 위조’ 파문을 겪을 때만 해도 지금 같은 ‘제2의 전성기’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학벌이 아닌 배우 경력을 인정받아 명지전문대 연극영상과 부교수 자리는 지킬 수 있었지만 각종 위원이나 홍보대사 등 사회적 활동은 모두 접어야 했다. ‘엄뿔’ 초기만 해도 시청자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심지어 드라마 포스터에도 사진이 가장 작게 실렸다. 그런 그를 ‘엄뿔’이 최고의 스타로 살려 낸 것이다.

그런데 잘난 척하는 재벌집 사모님은 시청자의 미움을 받는 전형적인 악역이 아닌가. 왜 시청자는 한자나 영미의 입장에 서서 은아를 비난하지 않을까. ‘사랑스럽고 귀여운 구석까지 있어서 미워할 수 없다’ ‘나이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멋진 외모가 부럽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시청자의 반응은 배우 장미희의 매력에 힘입은 바 크다.

고은아가 현실에서 만나보기 힘든 인물인데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미세스 므은’이라고 짧은 대사의 뉘앙스까지 살려서 대본에 표기한 김수현 작가의 치밀함 때문만은 아니다. 패셔너블하고 가식적일 만큼 우아한데다 최근 몇 년간 사랑스러운 코믹 이미지까지 덧입혀진 ‘연예인 장미희’의 모습이 고은아에 그대로 투영되는 것이다.

장미희는 평소 패션에 관심이 많아 본인 의상만으로 충분한데도 ‘세련된 사모님’ 역을 소화하기 위해 개인 스타일리스트까지 고용했다. 배우가 드라마를 위해 스타일리스트를 따로 두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김수현 작가의 작품이라 유독 신경 썼을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외국에 머물 당시 김 작가의 작품에 출연 제의를 받았지만 귀국을 늦추는 바람에 무산된 일을 많이 아쉬워했다 한다.

장미희는 미용실에 가는 시간이 아깝고 원하는 분위기도 낼 수 없다며 직접 메이크업을 한다. 트레이너를 두고 체력단련을 꾸준히 해 “웬만한 남자보다 더 무거운 것도 들 수 있다”고 자랑한다. 이동통신 서비스 CF 촬영이 오전 11시 올림픽대로에서 시작해 다음날 오전 1시를 넘겨서야 끝났는데, 기자는 그가 어디에 기대어 쉬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언제나 허리를 꼿꼿이 세운 모습이었다. 한 치도 어긋나는 법이 없어 오전 6시에 촬영이 있으면 오전 4시에 이미 화장까지 마치고 매니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고맙습니다.” 기자의 이름을 부르며 악수를 청하는 손의 각도까지 마치 ‘고은아’가 드라마 속에서 그대로 걸어 나온 듯했다. 과연 배우 장미희가 아니었더라도 고은아가 시청자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

구희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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