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살인자’ 폭염, 태풍보다 무섭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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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 06면

서울에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8일 저녁 한강시민공원 여의지구에서 시민들이 무더위를 식히고 있다. 뉴시스

7일 오후 제주시 용담동의 한 농로 옆에서 고모(85·여)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이틀 전 30도를 웃도는 땡볕 속에 쑥을 뜯으러 나갔던 고씨가 집에 돌아오지 않자 경찰이 수색에 나서 찾아낸 것이다. 경찰은 고씨가 무더운 날씨에 탈진, 열사병으로 숨진 것으로 추정했다. 올여름 고씨 같은 ‘폭염 사망 추정자’가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다. 병원 응급실에는 더위로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가 들어오고 119로 도움을 요청하는 사례도 전국적으로 늘고 있다.

폭염 기세가 무섭다. 말복(末伏)인 8일에도 전국 대부분의 지방에서 낮 최고 기온이 30도를 웃돌았다. 서울 지역은 올 들어 가장 높은 35.4도를 기록했다. 이달에만 16건의 주의보와 6건의 경보가 내려진 것을 포함해 지난달부터 9일 현재까지 총 62건의 폭염특보가 발표됐다. 기상청 김승배 통보관은 “강한 햇빛 탓에 당분간 폭염이 이어지겠다”며 “중간중간 약간의 비가 내리겠지만 이달 말까지는 전반적으로 뜨거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나마 지난달에 비하면 공기가 건조해져 그늘에선 선선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다행이다.

올해 더위가 유난히 심해 보이는 것은 폭염이 예년보다 보름 이상 일찍 시작된 탓이 크다. 대개 북태평양에서 형성된 따뜻한 기단이 차츰 북상하면서 차가운 대륙성 기단과 부딪치며 6월 말부터 비를 뿌리는 장마가 계속된다. 이후 북태평양 기단이 한반도에 완전히 자리를 잡는 7월 말에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곤 했다. 하지만 올해는 북태평양 기단이 이례적으로 일찍 발달해 7월 초부터 한반도의 대기를 장악했다. 7월 열대야 일수도 늘었다. 지난달의 경우 전국 평균 최저 기온은 예년의 7월 평균보다 1.7도 높은 22.8도였다. 하루 최저 기온이 25도 이상인 날(열대야)은 전국 평균이 3.4일이었다. 전국적인 관측이 시작된 73년 이래 94년(7.4일), 78년(3.8일)에 이어 셋째로 많았다. 김 통보관은 “온난화로 우리나라 전체의 평균 최저 기온이 갈수록 상승하고 있는 데다 도시에서는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밤까지 이어져 열대야 현상이 자주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94년 여름에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해에는 북태평양 기단이 6월부터 올라와 석 달 동안 무서운 힘을 발휘했다. 최고 기온이 폭염특보 기준인 33도를 넘긴 날이 6~8월 3개월 동안 서울은 29일, 대구는 60일이나 됐다. 결과는 잔인했다. 전문가들은 그해 폭염으로 서울에서만 350~700명이 초과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65세 이상 노인 사망자는 예년 평균의 두 배에 달했다.

세계적인 기상 전문가 로렌스 칼크스타인 미국 마이애미대 교수는 지난달 29일 기상청 초청 강연에서 “태풍과 같은 현상은 경보가 주는 무게감이 있는 반면 폭염은 그렇지 못하지만 사망자는 훨씬 많이 낸다”고 지적했다. 태풍에 비해 폭염은 직접적인 재산 피해가 적은 데다 인명 피해도 나중에야 통계적으로 상관관계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아 ‘소리 없는 살인자(silent killer)’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최근 10년(1997~2006) 동안 폭염에 의한 사망자는 연평균 170명으로, 태풍으로 인한 사망자 117명보다 많았다. 국립기상연구소 최영진 응용기상연구팀장은 “폭염으로 인한 사망률 증가는 공간·지형·도시구조·인구, 특히 노인 인구 비율에 민감하다”며 “도시와 노인 인구가 많은 선진국이 오히려 폭염에 취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열대야와 무더위는 심장질환의 위험요소로 지적된다. 기온이 32도 이상이면 뇌졸중은 66%, 협심증 등 관상동맥질환은 20%가량 늘어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노령화 속도가 빠른 우리나라에서 폭염 대책이 시급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국립기상연구소 권원태 기후연구실장은 “2100년 우리나라 온실가스 배출량이 두 배가 된다는 비교적 낙관적인 가정 하에서도 평균 온도는 4도 정도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며 “열대야가 늘어나고 여름 기간이 길어지고 있기 때문에 더위에 대한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최근 정부는 팸플릿이나 독거노인 방문 간호사를 통해 폭염 건강관리 요령 등을 홍보하고, 에어컨이 가동되는 주민자치센터 등을 폭염 대피소로 활용하도록 하고 있다. 또 올해부터 시행한 폭염특보제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고온 건강경보 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최영진 팀장은 “더위가 심할 때는 일단 서늘한 곳으로 피하고 물을 충분히 마시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가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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