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티즌 카페엔 낭만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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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4일 편집회의를 마친 실버넷 기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신광휴.변노수.이종숙.박종진.오상현.오장열.백상덕.김영기.황순자.김금순 기자. [조용철 기자]

"지하철역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데 나만 안 주잖아. 그래서 하나 달라니까 그 청년 하는 말이 '할아버지, 이건 컴퓨터 광고예요'라는 거야. 내 참."

지난 14일 실버넷(www.silvernet.ne.kr) 편집회의가 열린 서울 등촌동 한국정보문화진흥원. 실버넷 박종진(64)기자가 사무실로 오는 도중 겪은 일을 동료 기자들에게 털어놓자 모두 너털웃음을 짓는다. 朴씨는 비주얼베이직까지 통달한 웹 프로그래머 수준의 컴퓨터 실력자인데 말이다.

실버넷은 한국정보문화진흥원과 실버넷운동본부가 노인 정보화사업을 위해 공동 운영하고 있는 무료 컴퓨터 교육운동 사이트다. 전국 70여개 대학에서 방학기간을 이용해 만 55세 이상 노인들에게 컴퓨터 교육을 하고 있다. 2000년 실버넷이 발족한 이래 지금까지 교육받은 수강생은 4만여명. 이들 중 선발된 27명의 기자들이 실버넷 사이트에 문화.사회.복지 등 다양한 분야의 기사를 올리고 있다.

"혹시라도 잘못 건드릴까 컴퓨터 자판 위에 쌓인 먼지를 닦을 때조차 조심스러웠다"는 사회복지부 이종숙(56)기자는 지난해 2월 실버넷에서 교육을 받고 컴맹에서 벗어났다. 李씨는 "노인들의 어려운 생활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꿈을 갖고 올 2월 신입기자가 됐다.

"노인세대가 왕따 당하는 일을 막고 싶다"는 황순자(64)기자는 지난 16일 '노약자 좌석'이란 기사를 올렸다. 전철 안 노약자 지정석에 앉아 있던 청년이 한 할아버지의 꾸지람을 듣는 광경을 목격하고 쓴 기사다. "젊은 사람이라도 몸이 아프거나 힘들 수 있는데 무조건 나무라는 건 안 된다"고 말하는 黃씨는 '나이 많다는 것 자체가 젊은이들에게 위협이 되기보다는 먼저 그들을 사랑의 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기사를 마무리했다.

실버넷 기자들은 대구 지하철 참사나 고속철 개통 등 역사적인 현장도 직접 찾아가 그들의 목소리로 뉴스를 전한다. 젊은 사람들과 보는 눈이 다를 때도 많다.

지난 총선 과정에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이 터졌을 때도 실버넷은 여느 매체와 다른 목소리를 냈다. '성난 노심(老心)'이 주제가 아니었다. '노티즌 카페에는 낭만이 흐른다'라는 제목부터 색달랐다. 이슈부 오장열(59)기자의 기사에는 실버세대의 '속'이 그대로 내비쳤다.

'성난 우리들의 목소리는 폭발하지 않았다…늙어감을 아쉬워하고 잡고 싶은 마음이 엿보인다…젊은 네티즌처럼 적극적으로 우리의 의견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인터넷도 못하는 걸로 치부하지만 우리 나름대로 인터넷을 향유하고 있다'.

이지영 기자<jylee@joongang.co.kr>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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