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플렉스와 자존심 이율배반적 공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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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 04면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한 베이징 올림픽 개막 공연엔 아무리 숨기고 싶어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중국 코드가 엿보였다. 용광로처럼 모든 것을 삼켜 버리려는 블랙홀의 미학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동경이 표출됐다. 개막식 직전에 진행된 조선족을 포함한 28개 소수민족의 민속공연은 그 욕구를 무엇보다 확실히 보여줬다. 대규모 시위, 폭탄 테러 소요를 일으킨 티베트나 신장위구르자치구의 몸부림이 결국은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헤어나지 못한 손오공의 도로(徒勞)에 불과하지 않으냐고 생각하는 것 같은 자신감이 읽혔다. 이 점은 주제가를 부른 브라이트먼의 창법에서도 일부 드러났다. 중국은 이 영국인 가수에게 중국어 가사로 부를 것을 주문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경극풍의 창법까지 구사토록 했다.

개막식 공연에 숨은 중국 코드

차이니즈 스탠더드(Chinese standard)에 대한 집착 역시 공연 전반에 숨겨진 코드였다. 압도적인 공연을 통해 중국적인 것이 세계적 표준이라고 반복해 주장하는 것 같았다. 이는 1, 2부 공연에서 경극을 비롯해 만리장성·실크로드·태극권 등 중국의 문화 콘텐트만을 잇따라 소개한 사실이 분명하게 말해준다. 이뿐만이 아니다. 공연의 키워드가 ‘세계의 언어로 중국의 고사를 말하다’였으나 정작 개회식장에서 서비스된 언어는 영어·프랑스어 등 제한된 일부 언어뿐이었다. 서울 올림픽에서 무려 12개 국어로 공연 실황을 중계 서비스한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차이가 난다.

베이징 올림픽의 개막식 예술 공연이 중화주의를 강렬하게 발산한 이유는 뭘까.
중국인의 5000년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선천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자부심이 아닐까. 그들의 집단 무의식 속에 외부인은 교화의 대상인 오랑캐일 뿐이었다. 이 오래된 중화사상이 개막 공연에 깔려 있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게다가 실용주의 국가 지도자 덩샤오핑 이래 30년 동안 개혁·개방 정책의 성공으로 중국은 강대국이 되었고, 중국인은 과거의 영광을 재현했다는 믿음이 생겼다.

이율배반적이게도 장구한 역사만큼 한족(漢族)이 경험한 치욕의 역사, 수치의 콤플렉스는 공연을 읽어 내는 또 다른 코드다. 한족은 중국인의 92%를 차지한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콤플렉스가 굉장히 많은 민족이다. 이민족에 지배를 당한 경험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정통 왕조를 중심으로만 살펴봐도 북위(北魏·선비족)를 비롯해 요(遼·거란족), 금(金·여진족), 원(元·몽골족), 청(淸·만주족)의 ‘오랑캐 종족’에 굴복한 뼈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다.

각론으로 들어가 보자. 금나라에 멸망한 북송(北宋)의 횡액이 그랬다.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금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일생을 마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둘의 비빈들이 금나라의 병사들에게 수없이 강간당했던 것은 지금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치욕일 터이다.

한족은 19세기 후반부터 공산당이 대륙을 통일한 1949년까지 영국·일본을 비롯한 선진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민족이 유린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 시절 상하이(上海)의 훙커우(虹口)공원 같은 곳에서는 ‘개와 중국인은 출입금지’라는 경고문이 항상 붙어 있었다.

평탄하게 살아온 사람은 콤플렉스가 적고 삶의 과장도 심하지 않다. 단 한번도 좋은 세월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 역시 극심한 콤플렉스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부침이 심한 세월을 살아온 사람은 그렇지 않다. 내면은 복잡하고 감정의 굴곡은 심하다. 알게 모르게 간직한 콤플렉스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중국의 유명 사회학자 사오다오성(邵道生) 사회과학원 교수는 “중국인은 콤플렉스덩어리”라고 표현했다. 100년 만에 한 번 찾아왔다는 기회에 1000년간 쌓인 콤플렉스를 한 방에 날려 버릴 장면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무대가 지나치게 중화주의적이라는 비난을 중국이 우려한 흔적도 있다. 공연 중간중간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대거 등장시킨 것은 ‘2008년 중국’의 새로운 가치관이다. 자부심과 콤플렉스, 극과 극을 오갈 수밖에 없는 중국 코드를 극복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중국은 자신들의 말대로 100년 만에 찾아온 꿈을 실현시켰다. 개막식 공연은 웅대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줬다. 세계인에게 감동과 두려움을 동시에 심어줬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세계인보다 중국인을 부각시켰다. 세계는 없고 중국만 있었다는 아쉬움이다.

후진타오 중국 수석은 개막식에 참석한 세계 정상들에게 “오늘날처럼 상호 이해와 관용, 그리고 협력이 필요한 시대는 없었다”라고 말했다. 주변에 대한 이해와 관용은 개막공연에서 더 많이 표현돼야 했었다.



홍순도 칼럼니스트는
1958년생. 매일경제신문·문화일보 기자 출신의 중국통. 경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보쿰대에서 중국학과 석사과정을 마쳤다. 문화일보에선 97년부터 9년간 베이징 특파원을 지냈다. 현재 중국 전문작가 겸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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