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자로가는길>합천 홍제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관광지에 있는 암자는 이른 아침이나 저녁 무렵에 가보는 것이좋다.많은 사람에 둘러싸인 암자를 보면 어딘지 지쳐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홍제암(弘濟庵)도 해인사 옆에 있기 때문에 한낮이면 사람들에게 시달린다.그래서 나그네는 서 둘러 정문격인보승문(寶勝門)을 지나 이른 아침의 암자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관광객이 아무도 없으므로 산새 몇마리가 짹짹거리고,계곡의 물소리가 들려올 뿐이다.암자 추녀 밑에는 분홍색 모란 꽃눈들이촉촉하게 부풀어올라 있고.암자는 사명(四溟)대사가 입적하기 3년 전(1608년)에 터를 잡았지만,선조의 도움을 받아 혜규(慧珪)선사가 시창(始創)했다고 한다.홍제암이란 이름은 선조가 대사의 입적을 애도하여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고 시호를 내린 데서 연유한 것 이고.
불사를 이끌어온 주지 종성(宗性)스님도 사명대사의 이야기부터한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선 스님의 호민(護民)정신을 기리는 곳이 바로 우리 암자지요.』 영자전(影子殿)에는 사명스님 말고도 청허(淸虛).영규(靈珪)대사를 비롯한 열 여섯분의 영정(影幀)이 모셔져 있는데,특히 일제 때 일본인의 군도(軍刀)에 의해 오른쪽 어깨에 상처가 난 사명스님의 영정은 지난 임진년의 역사를 다시 떠 올리게 한다.
일본인들이 지금까지도 사명대사를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그것은 허균(許筠)이 지은 비문에도 잘 드러나 있지만 침략국 일본에 대한 배일사상(排日思想)때문일 것이다.비문에는 사명대사가 왜군 진지로 가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 正)와 담판짓는 사실이 기록돼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조선에도 보배가 있습니까.』 그러자 스님이 잘라 대답했다.
『본국에는 없고 일본에 있소.』가토가 스님의 말뜻을 몰라『웬 말이요』하고 반문했다.이에 스님은『지금 우리나라는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보고 반드시 베어 얻으려 하고 있으니 보배가 일본에있는 것 아니겠소』라고 해 적장인 그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는것이다. 영자전을 나와 다시 한번 암자를 둘러보노라니 비로소 주련이 눈에 띈다.추사(秋史)의 글씨라는 종성스님의 설명이다.
주련 중에 한 구절을 읊조려본다.
「도심일명월(道心一明月)」.도를 품은 마음이란 밝은 달과 같다는 뜻이리라.그렇다.사명대사도,추사도,이 암자에서 입적한 자운(慈雲)스님도 동시대인들의 밝은 달이 되고자 살았던 분들이 아닐까.059932-7306.
정찬주〈소설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