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에디터 칼럼

봉하마을이 결단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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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미국에선 통 킴(Tong Kim)으로 불리는 김동현씨는 미 국무부에서 27년간 일했고 네 명의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어를 통역했다. 로널드 레이건, 아버지 부시, 빌 클린턴, 그리고 올해가 임기 마지막인 아들 부시까지.

워싱턴특파원 시절이던 2005년, 은퇴한 통 킴으로부터 가끔씩 한·미 정상들의 뒷얘기를 들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워싱턴에 왔다. 임기가 얼마 안 남았던 레이건 대통령이 물었다. “대통령을 그만두니까 기분이 어떠시오?” 전 대통령은 그 질문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육사 동창인 노태우씨가 후임 대통령이 됐으니 자기는 여전히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전 대통령은 답변 대신 “각하가 그만두시면 제가 나카소네 총리까지 포함해 모임을 만들겠다. 우리 셋이서 잘 지내자. 나한테 맡겨 놓으라”는 말을 했다 한다. 하지만 그는 보수 3거두의 모임 결성은커녕 얼마 안돼 백담사로 유배를 떠났다.

 이런 얘길 혼자 듣긴 아까워 통 킴에게 중앙일보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 연재하자고 제안했다.

첫 원고는 2000년 평양에서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나는 장면이었다. 흥미진진했다. 대박 예감. 4회분인가까지를 미리 받았는데 갑자기 통 킴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CIA가 너무 까다롭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미안하다.”

미국에선 비밀업무를 취급했던 공무원이 책을 쓰려면 CIA의 사전검열을 받아야 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너무 아쉬웠다. 하지만 미국의 엄격한 국가정보 관리시스템이 부럽기도 했다. 하긴, CIA 비밀요원의 신원을 기자에게 알려줬다는 이유(리크 게이트)로 대통령과 부통령이 특별검사에게 진술을 해야 하는 나라니까.

그렇게까지는 기대도 안 한다. 하지만 요즘 청와대와 봉하마을 사이에서 벌어지는 자료 유출 논란은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다. 그동안 나온 주장을 종합하면 대충 이런 얘기다.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은 퇴임하면서 이명박 당선자 측에 “자료를 인수받으라”고 했다. 이 당선자 측에선 “필요 없다”고 했다. “우리가 쓰던 자료 좀 가져가겠다”는 노 측의 얘기에 대해서도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정작 청와대에 들어가 살펴보니 무기체계와 북핵협상 내용 등 기밀문서를 포함해 몽땅 다 가져갔더라는 것이다.

“우리에겐 인사자료 하나 남아있지 않아 장·차관 임명 때 쩔쩔맸다”는 여권의 얘기엔 할 말을 잃게 된다. 이명박 정부가 국민을 실망시킨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구멍가게 인수도 그렇게는 안 한다. 인수를 제대로 못 받은 건 전적으로 현 정부의 잘못이다. 게다가 그런 사실을 발견했으면 정권 출범 직후 바로 회수를 시도했어야 마땅하다. 인수 잘못했다는 비난을 받을까봐 쉬쉬하다가 촛불 타이밍에 맞춰 터뜨린 것 아닌가. 그게 오해인가.

 봉하마을의 해명도 이해할 수 없긴 마찬가지다. 회고록을 쓰기 위해서였다는데 어차피 공개할 수 없는 비밀자료들은 왜 가져갔는가.

또 정부 고위관료와 언론인·기업인 등 수만 명의 인사기록은 회고록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무슨 권리로 개개인의 인사 파일을 보관하고 있는가. 당사자들이 소송이라도 낸다면 어떻게 하려는가.

석연찮은 건 그뿐 아니다. 인사 파일엔 고위 군 장성과 국정원 간부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만의 하나 이들의 신원이 외부로 유출되면 국익에 얼마나 큰 손상을 입히게 될지 생각해 봤는가. 한·미 간의 대북 전략이나 미사일부대 위치, 전쟁 발발 시 전략 같은 건 또 어떤가. 봉하마을은 “절대로 그럴 일 없을 것”이라지만 그걸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전임 대통령들은 국가의 자산이고 원로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전임 대통령의 자존심이나 권위도 ‘국가의 이익’보다 앞설 수는 없다. 좀 억울한 대목이 있더라도 봉하마을은 논란 중인 컴퓨터 서버 본체를 빨리 건네주길 바란다. 명분이 무엇이든 간에 국가기록원에 있어야 할 자료를 퇴임 대통령 개인이 갖고 있는 건 분명한 잘못이다. 불필요한 혼란과 국민적 의구심을 잠재우기 위해 봉하마을의 결단이 필요하다.

김종혁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