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老母의 독서삼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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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지난해 가을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홀로 되신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왔다.
우리 집에 오신 어머니는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셨다.
비워놓고 온 시골집 생각,돌아가신 아버지 생각,혼자 살아갈 앞날의 걱정들만 있을 뿐 아무런 기쁨도 소망도 없는 듯 간혹 눈물짓는 노모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곤 했다.
할일이란 고작 아파트 주위를 산책하는 것뿐이었다.하루 하루의시간들이 길고 지루한듯 무척 심심해 하셨다.기분전환이 될만한 어떤 일도 찾지 못하셨다.「시간이 약이려니」 그런 생각으로 견디시는 것같았다.
어느날 어머니는 거실에 놓인 책 한권을 들고 읽기 시작하셨다. 설마 여든두살의 어머니가 우리가 읽는 소설이나 수필등을 읽으시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후 작은방에서는 찬송가를 부르듯 높낮이를 두어 책을 읽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나날이 계속되는 소리가락은 정겹기도 하고 가을 빗소리인양 구슬프기도 했다.
돋보기 너머로 꾸부리고 앉아 시간가는줄 모르고 열심히 책을 보시는 어머니는 눈이 아프시다고 하면서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독서에 빠져있을 때는 팔순의 할머니 모습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에 점차 편안한 안정감이 배기 시작했다.
며칠만에 두툼한 책 한권을 다 보시고는 『두번 읽으니 재미없다.다른 책 한권 더 주라』고 하셨다.
우리는 어머니께서 독후감을 쓰시면 출판사나 잡지사에 보내드릴것이라며 응원의 박수를 쳐드렸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웃음을 찾으신 것 같았다.이제 어느 책으로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까 시간만 나면 서점에 들르는 것이 하나의 일과가 돼 버렸다.
독서하는 팔순 노모의 모습은 서글프고 아름답다.
김계순 서울잠실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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