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건 방한 땐 카퍼레이드에 150만명 동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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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5일 서울공항에 도착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내외는 유명환 외교부 장관 내외의 영접을 받았다. 공항에서 도열한 의장병들이 예포 21발로 ‘정상’ 방한을 알렸지만 거창한 환영행사는 없었다. 정부는 오히려 경호에 몰두했다. 숙소 경호에 7000명, 시위 대응에 1만6000여 명의 경찰병력이 투입됐다. 30여 년 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찾으면 서울 시내에 꽃가루가 흩날리며 연도에 시민들이 동원돼 성조기를 흔들었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박정희 대통령 때인 1979년 6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자 정부는 방한 이틀째 여의도 광장에서 100만 명의 시민이 참여한 환영대회를 열었다. 환영대회 직후 카터 대통령은 카퍼레이드로 여의도에서 마포를 거쳐 시청앞까지 이동하며 80만 서울 시민의 환영을 받았다. 이날 뿌려진 오색 테이프는 36가마(8300㎏)나 됐다.

66년 10월 존슨 대통령 방한 때도, 74년 11월 포드 대통령 방한 때도 100만 명 이상의 시민을 동원한 가두 환영은 당연한 행사였다. 전두환 대통령도 환영 행사를 국가적으로 치렀다. 83년 11월 12일 김포공항에 착륙한 에어포스 원에서 내린 레이건 대통령 내외를 전두환 대통령 내외가 직접 영접했다. 공항 환영행사엔 진의종 총리 등 3부 요인이 모두 나왔다.

광화문 정부 중앙청사 등 시내 주요 건물들엔 ‘환영 로널드 레이건 미합중국 대통령 각하 내외분 공식 방한’이 쓰인 대형 현수막이 걸렸다. 공항을 떠나 시청앞까지 이르는 레이건 대통령 차량 일행을 150만 서울 시민이 나와 환영했다. 반공이 국시였던 박정희 정부와 정통성에서 부담을 느꼈던 전두환 정부가 미국을 가장 큰 지지기반으로 여겼던 당시 정치 상황이 반영된 것이다.

대형 환영 행사는 북방정책을 추진하던 노태우 대통령 시절 축소됐다. 노 대통령은 92년 1월 5일 방한한 아버지 부시 대통령 일행 영접에 정원식 총리를 내보냈고 떠들썩한 환영식 없이 7분으로 행사를 줄였다. 노 대통령은 대신 청와대 본관 현관에서 부시 대통령을 맞았다. 카퍼레이드나 시민 동원도 사라졌다. 문승현 외교통상부 의전총괄담당관은 “김영삼 대통령 때부터는 방한 의전이 본격적으로 축소됐다”고 말했다. 93년 7월 10일 클린턴 대통령 방한 때는 공항 영접을 한승주 외무장관이 맡아 기존 총리급에서 한 단계 떨어졌다. 군 의장대의 영접도 생략됐다. 이 같은 축소 의전은 이후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로 이어져 관행이 됐다.

5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방한을 놓고는 서울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찬반 집회가 벌어졌다. 사상 최대의 경호작전 속에 부시 대통령의 동선과 일정은 철저히 비공개에 부쳐져 달라진 우리 사회를 실감케 했다.

이정희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미국 대통령을 맞는 모습이 바뀐 것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 설정이 일종의 열등한 비대칭관계에서 점차 대칭적 관계로 이동해 온 때문”이라며 “우리 사회가 다원화돼 다양한 목소리가 동시에 분출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성한 고려대 교수는 “이 같은 변화의 가장 큰 원인은 결국 ‘민주화’”라며 “지금은 일방적인 동원이나 통제가 불가능한 데다 민주화의 산물로 다양한 이념이 섞인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채병건·이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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