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재값 치솟고 납품가는 깎이니 사람 자를 수밖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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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지난달 25일 오후 3시쯤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의 공단파출소 앞. 왕복 6차로가 한산하다. 제품을 가득 실은 트럭이 바삐 오가리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공장이 밀집한 지역으로 들어서도 비슷하다. 행인도 거의 없다. 철문을 굳게 닫은 회사도 적지 않다. 기업은행 반월지점의 이민성 PB(프라이빗 뱅킹)팀장은 “요즘 반월공단의 중소기업들은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며 “공단 전체가 활기를 잃은 모습”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원유·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채산을 맞추기가 빡빡해졌다. 제조 원가가 높아졌는데도 납품가는 되레 깎이고 있기 때문이다.

원유가에 민감한 화학섬유 업체인 대성섬유 김원호 대표는 “이런 고유가가 내년까지 지속되면 한국 중소 섬유업체의 절반은 문을 닫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올 들어서만 원단 가격이 40%가량 올랐으나 내수 부진으로 매출은 줄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금리 상승으로 늘어난 대출 이자도 고민이다. 김 대표는 “1년 새 대출 금리가 2%포인트나 올랐다”며 “지금 벌이로는 이자 갚기도 쉽지 않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을 내보내 원가를 줄이는 일이라고 한다. 그는 감원을 입에 올리며 “한솥밥을 먹는 사람을 내보낼 때마다 고통은 말도 못한다. 최후의 발악이다”라고까지 했다. 천보섬유의 김영학 대표도 “연봉 2000만원 받아가며 열심히 해보겠다는 사람들을 내칠 수 없어 같이 버티고 있다”며 존립 기반이 흔들리는 섬유업계의 사정을 들려줬다.

산업용 텅스텐 공구를 만드는 명진산업의 이혁제 대표도 “이런 상태로는 회사를 계속 운영하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텅스텐 공급을 쥐락펴락하는 중국 업체들이 올 들어서만 텅스텐 가격을 30%가량 올렸다. 하지만 이 회사는 납품 단가를 오히려 20% 내려야 했다. 이 대표는 “국내 납품업체를 통해 일본에 수출하는데 막무가내로 단가를 낮추라고 하면 수용할 수밖에 없다”며 “업종 전환을 고려하고 있지만 자금력이 문제”라고 말했다.

수압 절삭기 메이커 워터라인의 양원섭 대표도 같은 고충을 겪고 있다. 생산 원가가 올랐는데도 대기업이 납품 단가를 올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원자재인 스테인리스 값이 3개월 새 30%정도 올랐다”며 “이를 납품가에 반영하려면 1년 정도 걸린다”고 말했다.

이는 공단의 기업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은행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해엔 2~3개월에 한 번씩 수천만원을 예치하던 중소기업 사장님들도 요즘은 예금이나 보험을 해지하기가 바쁠 정도지요. 월 5만원씩 내던 적금마저 깨는 중소기업 직원들이 늘면서 지난달 적금 중도 해지율은 30%까지 치솟았습니다.“(이민성 팀장)

통계상으로도 이자를 제때 갚지 못하는 중소기업이 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6월 말 현재 중소기업 대출(원화 대출 기준)의 연체율은 1.14%로 1년 전(0.99%)에 비해 0.15%포인트 높아졌다. 금감원 관계자는 “대출 후 2년이 지난 시점부터 연체가 증가하는 점을 감안하면 중소기업 대출의 연체율은 갈수록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이갑수 수석연구원은 “고유가와 원자재값 상승이 지속되면 한계기업뿐 아니라 재무구조가 좋은 기업까지 위태롭게 된다”고 말했다.

김준현 기자, 남기엽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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