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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값 매각’ 괴담의 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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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광우병 괴담이 잦아든 이후에도 아직 시원하게 풀리지 않은 괴담 하나가 있다. 바로 ‘외환은행 헐값 매각’ 괴담이다. 이 괴담은 어찌나 뿌리가 깊고 생명력이 끈질긴지 벌써 여러 해를 넘겼는데도 쉬 가라앉지 않는다.

시작은 ‘배 아픈 병’이었다. 2003년 외환위기의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던 외환은행은 자회사였던 외환카드의 부실 때문에 심각한 자본부족 상태에 빠져들었다. 정부는 외환위기 직후 막대한 공적자금을 쏟아부은 터여서 외환은행까지 공적자금을 넣어 살릴 형편이 못 됐다. 팔려고 내놨지만 외환위기에서 겨우 살아난 국내은행들은 살 여력이 없었고, 외국의 괜찮은 금융회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나마 외환은행의 가능성을 보고 거액의 부실을 떠안겠다고 나선 게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였다. 이때만 해도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됐다.

그런데 다 죽어가던 외환은행이 3년 만에 버젓하게 살아났다. 론스타가 1조3000억원에 사들였던 외환은행의 몸값이 4조5000억원으로 불어났다. 투자원금의 세 배가 넘는 어마어마한 대박이다. 2003년 3월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국민은행에 팔기로 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이때부터 ‘배 아픈 병’이 도지기 시작했다. ‘먹튀’라는 말도 나왔다. 관심은 온통 론스타가 챙기게 될 매각차익에만 쏠렸다. ‘배 아픈 병’ 증세는 이윽고 “막대한 국부 유출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선동적인 주장이 더해지면서 괴담으로 발전했다.

괴담의 시발은 ‘외환은행을 인수한 론스타가 은행법상 은행을 인수할 수 있는 금융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격이 없었다’는 주장이었다. 사실 엄격히 보자면 사모펀드인 론스타는 금융회사가 아니다. 그러나 그러기로 말하면 한미은행 지분을 소유했던 칼라일이나, 제일은행을 인수했다 되팔아 거액을 챙긴 뉴브리지캐피털의 전례가 있었다. 정부가 외환위기 직후 급한 김에 이들 사모펀드도 광의의 금융회사로 인정했다. 뒤늦게 론스타만 문제 삼을 수 없는 이유다.

자격시비가 먹히지 않자 괴담은 돌연 ‘헐값 매각’ 시비로 비화했다. 론스타가 공무원들과 짜고 외환은행의 부실규모를 부풀려 터무니없이 인수가격을 낮췄다는 것이다.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조작했다는 내부의 폭로가 나오면서 괴담은 점점 더 설득력을 얻었다. 국민은행에 매각하려던 계획은 없던 일이 됐다. 급기야 감사원이 특별감사에 나서고 검찰이 수사에 들어갔다. 금융권에서 떠돌던 괴담이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을 중단시키고 국가기관을 동원할 정도의 괴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감사원의 감사결과는 괴담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고, 검찰은 애꿎은 관련자 몇 사람을 기소했지만 뚜렷한 증거를 대지 못한 채 지루한 법정공방만 벌이고 있을 뿐이다.

론스타는 새로운 인수자를 물색한 끝에 지난해 9월 영국계 은행인 HSBC와 계약을 했다. 그러나 괴담의 파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금융감독위원회는 사법절차가 끝나기 전까지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겠다고 했다. 그 후 정권이 바뀌었다. 새로 출범한 금융위원회는 최근 입장을 바꿔 HSBC의 인수자격 심사에 착수했다. 재판결과를 지켜보겠다고 했지만 사실상 HSBC의 인수를 승인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도대체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괴담이 사라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 해답은 외환은행 노동조합의 태도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초 국민은행이 인수한다고 했을 때는 결사반대했던 노조가 HSBC의 인수는 환영했다. HSBC가 외환은행의 독자생존을 보장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론스타의 ‘먹튀’나 ‘헐값 인수’가 문제가 아니라 인수자가 문제였던 것이다. 괴담의 재료가 된 내부정보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보면 괴담이 처음부터 무엇을 겨냥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괴담의 진상이 이렇다면 부질없는 ‘헐값 매각’ 재판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 그동안 괴담에 놀아난 것이 허망할 뿐이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