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막식 입장 한자 획수 순서대로 … ‘차이나스탠더드’ 야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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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올림픽 개막을 11일 앞둔 28일 천안문광장에서 올림픽 조형물 설치작업이 한창이다. [베이징=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과거의 거대 중국 제국엔 표준이 필요했다. 너른 지역의 많은 사람을 통치하기 위해 가장 먼저 요구된 작업은 이들에게 전부 들어맞는 기준의 틀을 만드는 것이었다. 최초의 통일제국을 세운 진시황(秦始皇)이 제국의 기반을 다진 뒤 우선적으로 착수한 것도 길이(度)·부피(量)·무게(衡)의 단위를 통일하는 작업이었다. 중국 고대 문헌인 ‘예기(禮記)’에는 “세계 모든 곳에 내놓아도 꼭 들어 맞는 원칙(放之四海皆準)”을 세우라는 말이 나온다. 표준에 대한 이런 강박관념 때문인지 수레의 두 바퀴 폭을 잘못 만들어 오류를 범하는 ‘전철(前轍)’의 고사까지 만든 게 과거의 중국이다.

 이제 새롭게 부상하는 사회주의 중국이 과거의 통일제국과 다를 리 없다. 올림픽을 통해 명실상부한 강대국으로 부상하려는 중국은 스스로의 것을 세계에 전파하려는 야심에 가득 차 있다. 이른바 ‘차이나 스탠더드(China Standard)’의 전면적 부상이다.

올림픽 개막식의 입장 순서는 중국 한자(漢字)의 간체자(簡體字) 획수 순서로 정해진다. 이에 따라 한국은 204개 참가국 중 176번째, 북한은 177번째로 입장한다. 한국의 한(韩) 간체자와 북한(朝鮮)의 조(朝) 모두 12획이지만 둘째 자인 국(国)의 간체자가 선(鮮)보다 획수가 적어 한국은 북한에 앞서 입장한다.

과거 올림픽 개최국이 참가국 선수단의 입장 순서를 매길 때 현지 발음을 영문 알파벳으로 정했던 관행과는 딴판이다. 중국인의 관념엔 ‘한자는 중국 것’이라는 수준을 넘어 ‘한자는 세계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는 모양이다.

이는 중국 문화를 전 세계로 확산하려는 ‘공자(孔子)학원 운영’으로 구체화한 지 오래다. 현재 전 세계 64개 국가에 210개 공자학원이 세워져 중국 문화를 전파하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카를 마르크스의 고향인 트리어시에도 독일에서 여덟 번째인 공자학원이 세워졌다.

공자학원을 지원하는 한어(漢語) 보급 판공실(國家漢辦)의 왕융리(王永利) 부주임은 “전 세계에서 4000만 명이 중국어를 배우고 있다”며 “미국 중·고교에서 제2 외국어로 중국어를 선택하는 학생이 연 200%씩 증가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이제 ‘중국식 사회주의’는 그 내용이 자본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 헷갈리는 판본이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말로 에둘렀지만 속 내용은 중국이 맞이하는 국내외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 경제발전이 민주화를 수반할 것이란 서구 정치학의 교과서적 관념도 중국에는 맞지 않을 전망이다. 오히려 중국식 경제·정치발전 모델이 다른 저개발 국가의 발전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정치적 자유화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시장경제적 요소를 최대한 도입하는 중국식 발전모델을 일컫는 용어인 ‘베이징 컨센서스(北京共識)’가 유행하는 배경이다. 정치에서도 차이나 스탠더드가 부상한다는 얘기다.

세계로 통하는 표준을 세우고 이를 전 세계에 확산하려는 중국의 노력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기술 분야다.

올림픽 자원봉사에 나선 베이징대 학생 왕위(王宇·25)는 최근 베이징 올림픽위원회로부터 휴대전화 한 대를 공짜로 받았다. 세련된 디자인의 휴대전화 정면엔 올림픽 마크가 새겨져 있다. 왕위의 휴대전화는 문자와 통화만 가능했던 기존 것과는 달리 TV를 볼 수 있고, 영상 통화도 가능하다. 중국이 제3세대(3G) 이동통신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이 왕위의 휴대전화는 차이나 스탠더드의 결정판이다. 세계 3G 이동통신의 주류는 미국식 CDMA 2000과 유럽식 W-CDMA 등으로 양분돼 있다. 한국의 경우 CDMA 2000 방식이 주종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 두 기술의 수용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3G 방식을 채택했다. TD-SCDMA기술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기술은 이미 세계 공인을 얻었고, 차이나모바일은 설비 구축에만 150억 위안(약 2조2250억원)을 투입했다.

“자원봉사자에게 모두 10만 개를 배포했습니다. 올림픽이 열리는 10개 도시를 시작으로 TD-SCDMA 방식의 이동통신 서비스가 시작될 것입니다. 올림픽을 계기로 중국도 이젠 3G 이동통신 원천기술 보유국이 된 것이지요.” 중국의 3G 사업을 주관하는 차이나모바일의 올림픽사업 담당자 쉬다(徐達)의 말이다.

중국이 이번 올림픽을 통해 새롭게 선보일 또 다른 기술은 모바일 TV 기술이다. 중국은 이 기술 역시 독자개발 방식을 채택했다.

한국에 DMB가 있다면 중국에는 ‘CMMB(China Mobile Multimedia Broadcasting)’가 있는 셈이다. 이를 사용해 올림픽이 열릴 10개 도시를 포함한 중국 전역 37개 도시에서 모바일 TV를 시청할 수 있다. 중국 방식의 이동통신 휴대전화로 중국 고유 기술로 만든 ‘이동TV’를 시청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중국의 대표적 통신업체인 중싱(中興)통신 뤄중성(羅忠生) 이동통신부문 총경리는 “서구 방식을 들여오면 안정적인 서비스를 보다 빨리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방 기술에 종속되면 우리는 영원히 2류 국가에서 헤어날 수 없다. 자주 기술·브랜드만이 중화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 이는 물론 13억 시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서방의 기업 역시 중국이 추진하는 차이나 스탠더드 구축 움직임을 외면할 수 없는 처지다. 중국시장을 잡지 않고는 세계 일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TD-SCDMA 기술개발에는 이미 삼성과 LG, 지멘스 등이 참여했고, CMMB 사업에도 세계 핵심 기업들이 참여했다.

차이나 스탠더드가 13억 시장을 무기로 글로벌 스탠더드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이제 각 분야 자국 기술의 국제 표준화를 노리고 있다. 무선 랜 보안분야의 와피(WAPI)를 국제 표준으로 만들기 위해 Wi-Fi를 내세우고 있는 미국과 힘겨루기 중이다. 서방 기업들이 중국산 DVD 플레이어에 대해 지적재산권 문제를 제기하자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같은 기능의 기술 제품인 EVD 플레이어를 개발해 올해부터 판매에 들어갔다.

한자를 필두로 한 언어와 문화 분야, 서구 민주주의와는 다른 발전 방향을 고집하는 정치적 자주 노선, 최첨단 이동통신 기술 분야에서의 자체 브랜드 확립 등은 차이나 스탠더드의 전면적인 부상을 예고한다.

올림픽은 중국적 표준의 세계화가 더 큰 물결을 이루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유광종·한우덕 기자, 베이징=정용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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