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3> 마오쩌둥 형제와 결혼한 여걸 자매<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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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쯔전(왼쪽)은 마오쩌둥의 세 번째 부인이다. 동생인 허이(오른쪽)도 그의 동생 마오쩌탄과 결혼했다. [김명호 제공]

1927년 봄 징강산(井崗山) 동쪽 언저리인 장시(江西)성 융신(永新)현에 중국공산당 임시위원회가 성립됐다. 지역 명문가인 허(賀)씨 집안의 민쉐(敏學)·쯔전(子珍)·이(怡) 3남매가 모두 위원에 당선됐다. 사람들이 ‘융신산허(永新三賀)’라고 불렀다. 얼마 후 우파가 융신현을 장악해 민쉐와 당원들을 체포했다. 쯔전은 지안(吉安)현에 있어 다행히 화를 면했다.

융신을 탈출한 당원들이 지안현에 집결했다. 수호전(水滸傳)의 영향을 많이 받은 위안원차이(袁文才)의 농민 자위군이 그곳에 있었다. 이들과 연합해 융신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현성을 점령하고 동료들을 구출했다. 정부군은 후난(湖南)성의 병력까지 투입해 융신을 공격했다. 허쯔전은 적위대를 이끌고 성의 남문에서 정부군을 격퇴했다. 허쯔전의 사격은 백발백중이었다. 그때부터 ‘쌍권총’이 그의 애칭이 됐다. 철수를 시작한 연합부대는 징강산으로 향했다. 징강산에 도착한 허쯔전은 지독한 학질을 앓기 시작했다. 18세 때였다.

같은 해 가을 마오쩌둥(毛澤東)은 첫 번째 무장봉기에 실패했다. 잔여 병력을 추슬러 징강산 밑자락에 도달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아 보이는 마오에게 위안원차이는 징강산에 올라가 대사를 도모하자고 했다.

허민쉐는 자신의 집을 마오에게 제공했다. 몇 걸음만 걸으면 위안원차이의 집이었다. 허쯔전은 그곳에서 학질을 치료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밤마다 산책을 즐겼고 날이 밝으면 단풍나무 숲 근처에서 아무나 붙잡고 얘기 나누기를 좋아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날락했고 그럴 때마다 위안원차이의 집 앞을 지나게 마련이었다. 병에는 차도가 있었지만 신체가 허약해진 허쯔전은 문 앞에 앉아 가을 햇볕을 쬐고 있을 때가 많았다. 마오의 외출이 더 잦아졌다.

이듬해 6월 허쯔전은 공작대를 인솔해 융신현 서쪽 탕볜춘(塘邊村)의 토호들로부터 토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분배했다. 뒤이어 마오쩌둥의 무장병력이 탕볜춘에 도착했다. 숙소가 마땅치 않았다. 공작대는 허쯔전이 묵고 있던 노파의 집에 마오를 머물게 했다. 지주 보안대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마오는 혁명가와 군사전략가의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내곤 했다. 화약냄새가 진동하는 속에서 두 사람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징강산으로 돌아온 허쯔전은 마오와 함께 기거했다. 마오의 비서였지만 식만 올리지 않은 부부였다. 3년 후 허쯔전의 동생 허이도 마오의 막내동생 쩌탄(澤覃)과 결혼했다.

국민당의 제5차 공세가 시작되자 홍군(紅軍)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장정(長征) 도중 마오쩌둥은 당권을 장악했다. 허쯔전은 구이저우(貴州)를 지날 때 적의 기총소사로 머리·등 14곳에 총탄과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입었지만 두 사람 모두 구사일생으로 옌안(延安)에 안착했다.

옌안은 중국혁명의 성지가 됐다. 각지에서 지식인과 청춘남녀들이 몰려들었다. 마오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허쯔전에게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둘 사이에 3남2녀가 태어났지만 모두 오래 살지 못했고 허쯔전에게 정신적 상처를 입힌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했다. 마오쩌둥은 오해라고 했지만 허쯔전은 옌안을 떠나고 싶었다. 시안(西安)을 거쳐 상하이(上海)로 나가 몸 안에 박힌 탄환과 파편을 제거하는 게 소원이었다. 다시 임신을 하게 되자 허쯔전의 결심은 굳어졌다. 1936년 건강한 딸이 태어났고 이듬해 겨울 허쯔전은 옌안을 떠났다. 마오쩌둥이 아무리 만류해도 듣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마오쩌둥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몰랐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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