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2> 90세 老정객의 못 다 이룬 國共담판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장스자오(왼쪽)와 마오쩌둥. 평소 장을 존경했던 마오가 매우 공손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게 이채롭다. [김명호 제공]

1956년 봄 중국공산당은 건국 후 최초로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제의했다.

49년 국공(國共)의 마지막 담판에 국민당 대표로 참석했다가 베이징에 눌러앉은 문사관(文史館) 관장 장스자오(章士釗)가 홍콩행을 자청했다. 홍콩에 나가 장제스(蔣介石)와의 대화 통로를 개설해 보겠다는 장스자오의 요청에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동의했다.

장제스에게 전달될 편지가 작성됐다. 말미에 “펑화(奉化)의 선영과 옛집은 여전하고, 시커우(溪口)의 화초(花草)도 예전과 다름없다”라는 구절을 첨가했다. 펑화와 시커우는 장제스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았던 고향 마을이다. 펑화에는 부모의 무덤이 있고, 시커우는 일초일목(一草一木)이 눈에 선한 곳이었다.

홍콩에 도착한 장스자오는 국민당 주재원인 홍콩시보(香港時報) 사장 쉬샤오옌(許孝炎)과 회견했다. 쉬는 곧바로 귀국해 장제스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장제스의 부관은 “그날 밤 총통의 침실은 새벽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편지는 전달됐지만 대만해협(臺灣海峽)을 사이에 둔 샤먼(廈門)과 진먼(金門) 간의 포연은 그치지 않았다. 특히 5월 15일부터 일주일간 쌍방이 퍼부은 화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이때 느닷없이 필리핀이 남해제도(南海諸島)의 주권을 요구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포격이 중지됐고 국공 모두 남해제도는 중국 영토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만은 함대를 파견해 국기를 게양하고 군대를 주둔케 했다. 중국에서는 모른 체했다.

저우언라이의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민족과 중국의 이익에 중요한 일이라면 언제고 손을 잡고 단결할 수 있다”라는 성명이 발표된 3일 후 문화인 차오쥐런(曺聚仁)이 대륙으로 들어간 것을 시발로 여러 명의 밀사가 양안을 오갔으나 문화대혁명으로 중단됐다.

장스자오는 73년 봄 마오쩌둥에게 다시 홍콩행을 자청했다. 그해 5월 장을 태운 전세기가 카이탁 공항에 착륙했다. 홍콩에 착륙한 최초의 중국 민항기였다. 다음날부터 십여 년 전 좌절된 국공 고위급 회담을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이 90세의 중국 노인은 한 달 후 평생 냉정하고 엄숙했던 화려한 삶을 홍콩에서 마감했다.

김명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