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VS영화] 통제 불능 댄스 본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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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재즈 피아노 배우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쉘 위 댄스'의 주인공인 중년 회사원 스기야마와 똑같다고 느꼈다. 스기야마처럼 댄스교습소에서 창 밖을 응시하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아리따운 여인에게 이끌린 건 아니었지만 나 역시 매일같이 아이의 등굣길에 스치는 빌딩 꼭대기에 붙어 있던 '재즈'라는 글자를 올려다 보며 어린시절 포기했던 피아니스트의 꿈을 한번씩 떠올렸다.

그러던 어느날 스기야마처럼 '서른다섯 나이에 이래도 되나 '하는 심정으로 아는 사람들을 만날까 두려워하며 학원의 계단을 올랐고, 그와 똑같은 대사 "오래는 안 할 거구요. 그냥 취미반으로…"라고 주저하며 시작했다.

이후도 어쩌면 그렇게 영화와 비슷할까. 다행히 학원에는 나보다 나이 많은 주부도 있었고 학생들은 강의가 끝나면 식당에 모여 앉아 강사의 주목을 끌 방법을 이야기하다 선생님의 연주를 듣기 위해 처녀 때나 드나들던 홍대앞 카페까지 진출했다.

인터넷 카페 활동에까지 빠져들자 남편에게서 뒤늦은 재즈 바람이 진짜 '바람'을 가장하기 위한 것이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스기야마가 '슬로슬로 퀵퀵'을 지나 회전과 라틴댄스의 퀵스텝 연마에 땀을 흘릴 무렵 나는 '주요 3화음'과 '세븐스 코드'를 지나 '텐션'과 '보이싱'의 세계에서 절망의 한숨을 내쉬며 땀을 빼고 있었다.

난 안다. 이 새로운 세계의 마지막 계단인 '즉흥연주'의 경지에 내가 다다르기에는 너무 늦게 뛰어들었다는 걸. 지금 이것이 내 인생을 바꿀 수 없다는 걸. 하지만 스기야마와 나에겐 동지의식이 있다. 오랜 직장생활 속에서 헤엄쳐야 했던 인간관계들과 서류더미 속에서 그토록 드러내기 힘들었던 '나'라는 존재감이, 이렇게 사소한 손끝과 몸짓의 차이로 표현될 수 있는 기쁨. 나와 피아노 사이, 나와 파트너 사이에는 아무 장벽도 없다고 느낄 때의 그 '한없는 자유로움'에 공감한다.

'쉘 위 댄스'라는 영화가 흥겨웠던 건 그 속에 물론 춤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감동적일 수 있었던 건 그 춤의 순수함을 통해 자신의 참모습에 눈떠가는 한 인간이 중심에 있기 때문이었다.

외롭고 고독한 인간에서, 춤의 매혹을 통해 충만한 인간으로 태어나는 그 신비스러운 과정을 그린 그 코미디의 주인공은 '춤' 자체가 아닌 인생을 깨닫는 '사람'이었다. 영화에서 스기야마가 '춤'을 포기하겠다는 결심을 내리는 마지막 부분이 가장 끌리는 이유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는 춤의 환상을 버리고 현실로 돌아오지만 그 이후의 삶이 이전까지와는 정말 다르리라는 것, 그 풍요로워진 마음이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을 것이라는 건 너무나 확실하다.

영화 '바람의 전설'의 포스터는 그런 감동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은 유혹으로 다가왔다. 우리 나라에서 '사교댄스'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을 가진 본격적인 춤 영화라…. 기대를 높이기에 부족함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영화를 본 뒤의 느낌은 그리 속시원하지 않았다. 물론 영화에는 배우들의 노력으로 연마된 '춤'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너무 '춤'의 위력에 도취됐다고 할까, 아니면 그 순수한 세계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고정 관념을 깨뜨리려고 하는 노력이 지나쳤다고 할까. 어쨌든 '춤'의 순수함에 대한 의욕과잉으로 비틀거린다는 느낌이었다.

춤 영화라면 '쉘 위 댄스'처럼 아마추어 춤꾼들의 자기발견이나 전문 춤꾼들의 진정한 사랑 발견이라거나 하는 기존의 이야기틀을 변형하는 손쉬운 코스를 택할 수도 있었다. 이 영화엔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사교댄스'하면 카바레나 제비족을 떠올리는 우리 사회의 특수한 현실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과감한 시도가 분명히 보인다.

무료한 일상을 살던 주인공 박풍식(이성재)이 어느날 제비족인 친구 만수(김수로)의 강요로 춤의 세계에 첫발을 내디디며 느끼는 전율과 같은 감동 때문에 5년 동안이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춤을 마스터하지만 결국 그가 갈 곳은 '제비족'의 길밖에 없다는 영화의 스토리는 현실성이 있다. 그렇다면 그냥 그 순수성이 파괴된 제비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슬픈 인간의 슬픈 엔딩이 되었더라면 영화는 훨씬 더 현실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제비족'과 '카바레'라는 세속적인 공간속에 주인공을 몰아넣은 뒤에도 '춤의 순수함'으로 이 인간을 구원해 내고 관객에게 감동을 주겠다는 과도한 욕심을 부린다. 그래서 제비족이었던 주인공은 더럽혀진 영혼을 춤으로 되살리고, 심지어 관찰자였던 여자 형사 박솔미까지 춤으로 감동시켜 사랑으로 맺어진다는 설정까지 이르면 관객은 그 강요받은 '춤'의 위대함과 비현실적인 인간의 이야기에 거부감이 생기고 마는 것이다.

두 영화 모두 초점이 분명한 춤으로 인한 인간의 변화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거칠게 구분하자면 '쉘 위 댄스'엔 인간이 앞서 있고 '바람의 전설'엔 춤이 우위에 놓여있는 듯하다. 하지만 솔직히 '쉘 위 댄스'에 더 이끌리는 건 내가 스기야마와 같은 '아마추어'의 세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 나도 한 마흔쯤 돼서 멋있는 카페에서 연주할 수준쯤 되면 '바람의 전설'의 박풍식 같은 '프로'의 세계를 이해할지도 몰라. 그때까진 노력해 봐야지.

이윤정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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