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월남 간 순이가 찾은 건‘님’이었을까 ‘나’였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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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님은 먼 곳에’(24일 개봉)는 베트남전에 파병된 남편을 만나러 가는 여자의 로드무비다. 신파 순애보가 아닐까 싶지만, 이는 섣부른 예단이다. ‘님’이어야 할 남편과 사실 ‘남’만도 못한 쓸쓸한 사이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여자가 찾아가는 것은 ‘님’이 아닌 ‘나’에 가깝다. 전쟁은 이 여정이 거쳐야 할 거대한 우회로다.

주인공 순이(수애)는 농사일을 거들며 시어머니와 단둘이 산다. 남편(엄태웅)은 대학캠퍼스에서 만난 애인이 따로 있었고, 순이와 결혼한 직후 도망치듯 입대했다. 사정을 모르는 시어머니는 손자 소식을 독촉하며 매달 순이를 면회보내지만, 남편은 외박을 나와서도 순이와 몸을 섞지 않는다. 베트남 파병이 결정됐을 때도, 그 소식조차 알리지 않는다.

이런 남편을 굳이 만나러 순이가 베트남까지 가는 이유는 뚜렷하지 않다. 순이는 좀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며느리 때문에 외아들이 전장에 나갔다는 시어머니의 구박에, ‘출가외인’이라는 친정의 문전박대에, 자포자기 심정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하는 건 관객의 몫이다. 순이는 일부종사에 목을 맬 타입도 아니어서, 1970년 전후의 시대상황과 맞지 않는 옷을 걸친 여자처럼 보인다.

순이는 주인공이되, 온전한 화자는 아니다. 전반부는 밴드 리더 정만(정진영)이 이끈다. 명색이 위문공연단이지, 현지에 도착해 보니 알아서 노래하고 돈 벌 자리를 구해야 하는 처지다. 더구나 앞서 정만이 베트남에 남겨두고 간 빚 때문에 멤버들은 현지 술집에 묶인 인질 신세가 된다. 정만의 옛 동료 용득(정경호)이 합류한 뒤에야 밴드활동은 제 궤도에 오른다. 베트남 곳곳의 한국군을 무작정 찾아다니며 공연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체가 아닌, 보여지는 대상으로서 순이는 꽤 매력적이다. 배우 수애는 특히 무대 위의 순이를 연기할 때 빛난다. 제법 노래솜씨를 지녔으되 스스로를 억압하는 듯했던 시골부인 순이는 가수 ‘써니’로 새 이름을 갖는다. 진한 화장과 짧은 치마가 혹 어색하지 않을까 싶지만, 이내 군인들 앞에서 열창하며 즐거워한다. 결혼생활에서 찾을 수 없었던 자신감을 얻은 듯 보인다.

‘라디오 스타’ ‘즐거운 인생’이 그랬듯, 이 영화도 음악의 비중이 크다. 김추자의 노래로 유명한 ‘님은 먼 곳에’를 비롯해 ‘늦기 전에’의 서정성, ‘간다고 하지 마오’의 흥겨움, 팬서비스처럼 곁들여지는 ‘월남에서 온 김상사’까지, 신중현의 곡이 고루 활용된다. 이 영화에서 노래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생명을 구하는 역할을 한다. 밴드 멤버들이 고비에 놓일 때마다,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가락이 이들을 살려내곤 한다. 때로는 노래에 지나치게 많은 역할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베트남전에 대한 이 영화의 시각도 노래를 통해 드러난다. 입에 안 익은 팝송 ‘수지큐’를 미군 앞에서 부르다 공연을 망치는 순이, 익숙한 김추자의 노래를 부르면서 한국군을 사로잡는 순이가 대비된다. 이 영화는 감춰둔 욕심이 크다. 미군·한국군에 더해 베트콩의 입장까지 담으려 한다. 밴드 멤버들은 뜻하지 않게 베트콩의 포로가 되고, 인간적 교감을 체험한다.

전쟁을 둘러싼 여러 주체의 시각을 고루 담아내려는 이런 시도는 그 성과가 분명하지 않다. 전쟁은 순이의 여정에 하나의 이야기로 녹아드는 대신, 차례로 다가왔다 멀어져 가는 배경에 머문다.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하고 순이가 놀란 눈을 크게 뜨는 장면이 등장하되,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표현되지 않는다. 관객의 감성을 적극적으로 쥐락펴락했던 감독의 이전 영화들에 비해 이 영화가 한결 건조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마지막 장면에서야 순이는 비로소 내면을 드러낸다. 그토록 어렵게 굳이 남편을 만나러 온 이유를, 남편에 대한 감정을 단 하나의 동작에 강렬하게 싣는다. 되짚자면, 영화의 주제는 ‘님은 먼 곳에’보다는 ‘늦기 전에’에 가깝다. ‘님’보다는 ‘놈’으로 불러 마땅할 남자를 향해 이 여자가 너무 늦기 전에 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다행스럽다. 15세 관람가.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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