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역사] 43. 벌판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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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 안가로 끌려가기 직전의 필자.

방송문화연구실. 정순일(鄭純日)이 일본의 방송문화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와는 한국일보 때 인연이 있었다. 방송에 대한 전체적인 평론을 보내왔다. 그것을 자주 내줬더니 방송평(評)의 1인자처럼 됐다.

적절한 시기에 천관우형이 이상희(李相禧)라는 문리대 출신을 소개해 주었다. 한국인 최초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한 千형은 졸업한 제자가 있는데 취직 자리가 없다고 호소해왔다. 내가 맡았다. 정순일.이상희, 그리고 최병학(崔秉鶴)은 방송문화연구실의 핵심 멤버가 됐다. '주간 방송'이라는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펴내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그들이 만들었다. 방송에 대한 신랄한 평을 본 방송국에선 야단이 났다. 지금까지 안이하게 제작해온 방송국 측은 바짝 긴장했다. 한국방송의 비약을 위해 필요한 자극이 됐던 것이다.

고은정(高恩晶).김소원(金素園).신원균(申原均).이창환(李昌煥).정은숙(鄭恩淑).윤미림(尹美林) 등 당시 엘리트 성우들은 우리 연구실에 자주 몰려왔다.

나는 '속도 위반'으로 장남을 얻었다. 1년 뒤엔 쌍둥이가 태어났다. '늦장가 가더니 몹시 다급했던 모양'이라고 놀리는 듯한 기사가 동아일보에 실렸다.

나는 '이 생명 다하도록' 집필에 열중했다. 오후 7시30분 방영에 이어 다음날 오전 7시30분 재방송되는 한국 최초의 롱런 프로그램이 됐다. 나는 세미 다큐멘터리 수법을 썼다. 우리가 겪은 한국전쟁사의 반추였다. KBS에서 '산 넘어 바다 건너' 등을 쓰고 있는 조남사를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고 줄기차게 써나갔더니 굶주린 지식인들의 입맛에 맞은 모양이었다. '사상계' 편집장을 하던 소설가 김성한(金聲翰)씨가 그거 참 잘 나가더라고 평해주었다.

'이 생명…'의 집필을 마치고 1958년 여름이 무르익어갈 무렵 삼한출판사에서 계약하자고 왔다. 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사가 와 참고인 자격으로 서울시경에 나와달라고 했다. 반도호텔 앞에서 '양키 고 홈'이라고 쓰인 삐라를 뿌린 나의 동창이 있다는데 참고인으로 증언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 친구가 없다고 했더니 다시 왔다. 끌려간 것은 후암동 여염집이었다. 2층 구석에 앉아 있던 선글라스를 낀 사람이 대뜸 "놈, 대가리 좋게 생겼구나. 실컷 해 먹었지?"

나는 그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뭘 해 먹었다는 얘깁니까?"

"빨갱이 짓 말이야!"

"여보시오! 무슨 증거가 있소?"

"저 놈 봐라. 맛 좀 보여줘!"

나를 꿇어앉히더니 두 손을 묶어 머리 뒤로 넘기고. 다리 사이에 홍두깨를 넣은 다음 사람이 올라타는 게 아닌가.

"아야얏!" 비명을 지르는 내 앞에 온 선글라스가 무자비하게 뺨을 때렸다.

"했지?"

"안 했습니다."

"이 새끼! 맛 좀 봐야 알겠나? 했지?"

"안 했습니다."

그는 계속 "했지?"를 외치면서 나를 후려갈겼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했지?"소리가 아득히 멀어져갔다. 끝내 나는 "했다"고 대답해버렸다. 죽을 것 같아서.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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