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설마가 파생상품 잡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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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이모(32·회사원)씨는 인터넷으로 펀드 기준가를 확인할 때마다 속이 쓰리다. 2005년 11월 가입한 ‘우리파워인컴파생상품1호’ 펀드 때문이다. 현재 원금의 40%를 까먹었다. 이씨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한 달 뒤 판매된 2호는 원금의 5분의 4를 까먹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평가손이다. 만기가 2012년으로 많이 남았지만 그때까지 원금을 회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당시 은행 측이 내놓은 상품 안내서엔 ‘후순위채보다도 높은 안정성과 수익성’ ‘우리나라 국가 신용등급인 A3(무디스 평가)급의 장외파생상품에 투자해 원금 손실 위험이 거의 없다’고 적혀 있었다. 이씨는 “은행이 손실 위험을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며 소송을 준비 중이다.

고유가와 미국 경기 침체로 전 세계 증시가 급락하면서 파생상품의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국내 사정도 비슷하다. 증권가의 올 상반기 최고 인기상품인 주가연계증권(ELS)도 줄줄이 원금 손실 위험이 커지고 있다.

◇커진 원금 손실 위험=우리파워인컴펀드는 5년 만기 국고채 금리에 1.2%포인트를 더한 고정금리를 6년 동안 분기마다 지급하는 상품이다. 미국·유럽·일본 등의 100여개 주식으로 구성된 파생상품에 투자한다. 이들 주식이 설정일 당시 주가의 65%만 넘게 하락하지 않으면 원금 손실 위험이 없다. 이 때문에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는 이 파생상품의 신용등급을 A3로 매겼다.

그러나 지난해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터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 파생상품이 투자한 주식의 주가가 곤두박질친 것이다. 주로 미국의 모기지 및 주택 관련 회사다. 미국 1위 채권보증업체인 MBIA는 현재 주가가 발행 당시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미국 양대 모기지 업체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은 각각 82%, 90% 하락했다. 원금 손실 우려가 그만큼 커진 것이다.

◇ELF·ELS도 비상=대개 주가연계펀드(ELF)는 기준가가 설정일보다 40% 이상만 빠지지 않으면 원금을 보장한다. 그런데 자산운용협회 전자공시에 따르면 7월 초 현재 기준가가 600원(설정일엔 1000원)에 못 미치는 ELF가 47개에 달한다. 500원에 못 미치는 것도 23개나 된다. 만기 때 기준가가 오르면 손실을 만회할 수도 있지만 현재로선 원금 손실 위험이 커진 셈이다.

주가연계증권(ELS)도 마찬가지다. 특히 지난해 가을 증시가 고점을 찍었을 때 발행된 상품들이 문제다. 우리금융·SK·CJ·한화·미래에셋증권·삼성증권·대우증권·두산중공업·대림산업·대우건설·현대건설·GS건설 등은 지난해 고점 대비 주가가 30%, 많게는 절반 넘게 하락했다. ELS 중 이들 주식을 편입한 상품이 수두룩하다. 만기(2009∼2010년)까지 주가가 오르지 못하면 고스란히 원금을 까먹을 수 있다.

◇“파생상품 투자 유의”=ELS·ELF 등은 일반 주식과 달리 주가가 떨어져도 수익을 올릴 수 있어 최근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공모형 ELF 설정액은 이미 10조원을 넘어섰다. 2003년 3조5000억원에 불과하던 ELS 시장 규모도 지난해 26조원으로 커졌다. 올 5월 말까지 새로 발행된 ELS만 12조원에 달한다.

증시가 살아나면 원금을 회복할 수 있는 주식형 펀드와 달리 이들 파생상품은 정해진 기간 안에 가격을 회복하지 못하면 원금을 까먹을 수 있다.

자산운용협회 김정아 실장은 “ELS 등은 거의 원금 손실이 나지 않도록 설계됐지만 일단 손실이 발생하면 규모가 커질 수 있다”며 “상품의 위험성을 잘 파악하는 등 투자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란 기자

◇ELS·ELF=주가연계증권·펀드. ELS는 자금의 60~90%를 안정적인 채권에 투자하고, 나머지를 파생상품 등에 투자한다. 대개 연 10~20%의 고수익을 내도록 설계됐다. ELF는 ELS 등의 파생상품을 편입한 펀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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