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프리즘><인터뷰>대만 출신 리안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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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리안(李安.41)감독은 매우 양순해 보인다.별로 크지 않은 키에 동양인으로선 다소 큰 두 눈이 사슴을 연상시킨다.대만 출신의 신인급 감독으로서 할리우드대작을 성공적으로 해낸 사람에게서 기대할 법한 카리스마나 적극성.저돌성을 외모에 서는 전혀 감지할 수 없다.
이같은 느낌은 아마도 베를린영화제에서 같은 동양인으로서 그에게 품게 된 「안쓰러움」에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그의 첫 할리우드 데뷔작인 『감각과 분별』에 세계영화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사실에 비해 감독인 그는 어딘지 「아웃사이더」같은 이미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영화제 시작 직전에 발표된 아카데미영화상 후보지명에서 7개부문을 휩쓴 작품이 유독 감독상 후보지명에선 제외됐다는점은 이같은 생각을 더욱 굳혀주었다.
지난 16일 『감각과 분별』 시사회가 끝나고 열린 공식기자회견에서도 기 자들의 질문은 각색자이자 주연인 여배우 에마 톰슨에게 집중됐다.
리안은 자신만만하게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톰슨의 옆에서 간혹 자신에게 돌아오는 질문에 재치있게 답변하며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세계영화계는 『감각과 분별』이 리안의 영 화가 아니라 에마 톰슨의 작품인 것처럼 몰고가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이튿날 베를린의 팰리스호텔에서 따로 만난 그에게서는 중국인 특유의 저력과 끈기가 느껴졌다.세상이 뭐라 하든 「세계의 중심은 나」라는 중화사상이라고나 할까.
그는 결코 목소리가 크거나 말을 빨리 하진 않았지만 해야 할말은 빠짐없이 했으며 『결혼피로연』『음식남녀』,또 『감각과 분별』같은 유머와 풍자가 넘치는 작품을 만들어온 사람답게 좀 곤란한 질문을 재치있게 넘기는 슬기를 지니고 있었 다.
매사에 저돌적인 서양인들 틈에서 차분함과 여유로 버텼으리라는믿음이 갔다.
그는 원작자인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여학생용이어서」 한번도읽은 적이 없지만 『제작자로부터 시나리오를 받아보고, 또 책을찾아 읽었을 때 내가 타고난 제인 오스틴이란 느낌을 받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감독 제의를 받고 처음엔 당황했지만 『저 뱃속 밑에서내가 모든 어려움을 딛고 해낼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졌다』고 얘기한다.
리안감독은 이 작품이 『가족이야기.로맨스.사회풍자등 내가 작품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특히 전환기의 가족관계는바로 나의 테마다』고 설명한다.제작자가 그를 감독으로 선택하게된 것도 리안감독의 『결혼피로연』을 본 한 동 료가 우연히 추천해서다.
『19세기 영국의 풍습이나 언어, 생활상을 전혀 몰라 따라잡을 일이 많았지만 배우들과 작업하다 보니 그들 역시 모르는 게많았다.하기야 19세기를 직접 겪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그러니까 나의 해석이나 다른 사람의 해석이나 다 같은 것 아니겠는가.』 그에게서 남다른 배짱이 느껴진다.
물론 동양인으로서 극복해야 할 어려움도 많았다.
77년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이래 계속 뉴욕에서 살았지만 정통파 영어를 구사하는 영국 배우들을 통솔하기가 처음엔 힘들었다고.『복종하는 대만배우들과 달리 영국배우들은 따지는 점이 많아 애를 먹었다.영어가 달리기 때문에 배우들을 상대로 내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밤새 공부해 그 다음날 반박하곤 했다』고말한다. 상업성이 지배하는 할리우드의 제작시스템에 대해 그는 『대만에서는 내가 직접 시나리오를 썼고 감독에게 거의 전권이 주어지는 풍토였다.예산이 적은 대신 나의 개성을 확실히 드러내는 일이 가능했고,어차피 큰 돈을 벌 영화는 불가능했기 때문에오히려 예술영화가 가능했다.하지만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은 엄청난제작비를 투자하는 만큼 상업적인 성공을 원하는 것은 당연하고,그런 점에서 제작자와 감독이 서로 협상해야 한다.제작자는 관객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므로 들을 가치가 있 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감독으로서 정말 고집을 부리면 따낼 수 있는 것도 많다. 이번 작품에서 무명의 케이트 윈슬렛과 그레그 와이즈를 기용한 것은 제작자의 반대를 무릅쓴 나의 결단이었는데 결과가 좋았다.』 93년 동성애를 그린 데뷔작 『결혼피로연』이 뜻밖에국제적인 성공을 거둬 일찌감치 할리우드 제작자들에게 발탁(?)된 그는 『작업을 하다보니 동서양 사이에 유머감각의 차이를 느끼기보다 오히려 감동받는 요소들이 다르다는 것을 절감한다 .
예를 들어 동양인 관객들은 가족애에서 진한 감동을 느끼는 반면 서양관객들은 가족관계보다 다른 곳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것같다』고 분석한다.
요즘 중국.대만.홍콩의 영화가 세계적인 각광을 받는 현상에 대해 그는 『중국영화가 새롭고 신선하기 때문이다.신선한 것을 찾아나서는 것이 영화계의 생리 아닌가.중국영화가 신선해진 것은할리우드장르와 비슷한 멜로드라마나 쿵푸영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대가 중국적인 예술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지금은 중국영화가 뭔가 새롭고 에너지가 충만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도 싫증나면 세계영화계는 한국.베트남.멕시코 영화를 찾아나설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서 빠진데 대해 『대만사람들이 매우 언짢아한다고 들었다.집에도 내가 화를 내야 한다는 전화메모가 많이 남겨지고 있지만 나는 화를 낼 시간조차 없이 바쁘다』고 말하는 그는 『뭐든지 차근차근 성취해야 하며 나로서 는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든 경험을 쌓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유를 보였다. 아카데미 시상식 대신 리안감독을 바쁘게 붙들어맬 새 계획은 신작『눈보라(Ice Storm)』.할리우드와 미국독립영화의 중간성격인 이 작품은 리안감독이 처음 도전하는 「슬픈」영화다.『언젠가는 중국대륙에서 무사영화를 만들 생각』이라고 밝히는 그는 개성을 삼켜버리는 할리우드의 상업성과 타협하면서도 『결코 리안적인 영화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친다. ▶75년 대만국립예전 졸업▶뉴욕대학시절 졸업작품『FineLine』으로 학생영화제 그랑프리및 최우수 감독상 수상▶90년『추수(推手)』로 대만정부 선정 최우수 각본상 수상▶93년『결혼피로연(喜宴)』으로 베를린영화제 그랑프리 수상▶9 4년『음식남녀(飮食男女)』가 칸영화제 감독주간 개막작품에 오름 이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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