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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여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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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분단 독일에선 장벽이 동·서 베를린을 갈랐다. 운하지대에는 장벽이 없었다. 수많은 동독 탈출자들이 헤엄치다 조준 사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문제는 서베를린 주민의 희생이었다. 운하 주위의 산책객이 실족하거나 멋모르고 수영을 즐기다간 동독 초소에서 어김없이 총탄이 날아왔다. 운하 중간의 경계선은 애매했다. 동독 측은 “망명자로 오인했다”고 우기기 일쑤였다.

‘운하에서 신원이 확인되기 전까지 사격할 수 없다’. 난감해진 서독 정부가 동독에 금품을 주고 맺은 새 협약이었다. 그래도 희생자는 줄지 않았다. 신원을 알아내는 절차가 복잡했다. 강물에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이름이 뭔가” “어디에 사는가”라고 꼬박꼬박 물어야 했다. 동독 초소가 상부에 확인한 뒤 “망명자가 아니다. 사격하지 않겠다”는 메시지가 오는 데에만 30분 넘게 걸렸다. 익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운하 옆에 대기한 서독 구급차는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도전을 좋아해도 이곳엔 가지 마라’. 소말리아·이라크·아프가니스탄…. 얼마 전 포브스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여행지다. 전쟁이 진행 중이거나 마약과 무기 밀매에다 반군들이 툭하면 납치극을 벌이는 곳들이다. 이에 비해 미국의 포린 폴리시가 뽑은 ‘금지된 세계의 5대 절경’ 명단은 좀 다르다. 쿠바나 이란 같은 미국 적성국의 아름다운 해변들이 죽 열거된다. 그런데도 맨 먼저 꼽은 절경이 북한의 금강산. 이 잡지는 이런 설명을 붙였다. “때 묻지 않은 영적 휴양지이자 세계 최고의 환상적 여행지. 북한 방문 비자는 받을 수 있다. 다만 현지에서 문제가 생기면 도움을 받기 어렵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외교 전문지다운 안목이다.

그런 북한 금강산에서 불상사가 일어났다.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 그것도 치마를 입은 50대 여성 관광객이 북한군의 조준 사격에 희생됐다. 군대에서 초병들은 공포탄을 먼저 쏴야 한다. 실탄을 쏘더라도 다리나 팔처럼 생명에 지장이 없는 부위를 겨냥해야 한다. 우리 대법원은 암구호에 응답하지 못해 숨진 경우라도 국가에 엄격한 배상책임을 지우는 판례를 숱하게 냈다. 인간 생명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측 목격자에 따르면 북한 병사는 단 두 발로 가슴과 허벅지를 관통시켰다. 과잉대응의 혐의를 지울 수 없는 대목이기도 하다. 북한 측은 “모든 책임은 군사보호지구로 넘어온 남쪽에 있다”며 조사단의 방북을 막았다. 이러다간 금강산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여행지에 드는 것은 시간문제다. 서독처럼 현금을 건네면서 “앞으론 제발 총만은 쏘지 말라”고 애걸할지도 모르겠고.

이철호 논설위원